[화요칼럼]투사의 딸 백영옥여사를 애도하며

  • 입력 2007.12.04 00:00
  • 기자명 이현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영옥여사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3일에야 비로소 접했다. 여사는 실제로 11월 23일경에 별세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모르고 있다가 동네이장으로부터 듣게 됐다. 향년 칠십 두어세쯤 됐다. 백영옥여사는 독립투사 백기환 선생의 딸이다. 백기환은 일제당시 캐나다 토론토대 공과대학을 다녔던 엘리트로, 독립운동 당시 김구선생의 측근에서 활동했고 해방 후에도 김구가 암살당할 때까지 고락을 같이 했던 인물이다.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백기환은 남만주의 서로군정서 소속의 무장항일 투사였다. 그는 평양경찰서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선교사들의 구명운동으로 10년간의 옥살이를 하고 풀려났다. 그 후에도 일본의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신사를 폭파시키는 등 해방이 되는 날까지 25년간 쉬임없이 투쟁을 전개했다. 백기환은 철학이 뚜렷하고 성격이 매우 올곧았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철학과 더불어 이 나라가 겪은 고난의 역사 때문에 백영옥은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은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일제 때엔 왜놈 말을 배울 필요가 없다며 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광복 후에는 공산당 밑에서는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며 딸을 학교에 입학시키지 않았다.

백영옥 여사는 남한에서 여자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있었지만 두 번 모두 기회를 놓쳤다.

1947년 김구선생이 암살되자마자 백씨가족이 북한산으로 피신해 몇 년을 숨어 살았는데, 정부로부터 새로운 육군사관학교 건립에 대한 설계를 아버지가 의뢰받으면서 고등학교 입학에 대한 첫 기회가 찾아왔었다. 백여사는 아버지로부터 “이제 너는 여고에 입학할 수 있다. 학교 갈 준비를 해라”는 말을 들었던 그 때가 생애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6.25 동족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사촌언니의 해산 수발을 하는 동안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백여사는 가족과 헤어져 언니네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했다.

전쟁 와중에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또 다시 여고에 입학시켜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지만, 그 때엔 스스로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쟁 통에 쓰러져 가는 병사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영달보다도 투사의 딸답게 국가와 민족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간호사로서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일선 전투부대에 자원해서 원산까지 부대를 따라다니며 부상당한 수많은 병사들을 치료했다. 한국의 나이팅게일이었다. 그가 생전에 보여주었던 대체의학에 대한 해박한 치료법은 이 때 다져진 것이라고 말한적이 있다.

백여사는 내가 살고 있는 지리산 부춘골에 와서 ‘감로정사(甘露精舍)’라는 현판을 걸고 터를 잡은 지 꼭 12년이 됐다. 이미 서울서 대체의학자로 명성을 얻은 후 하동 청암의 청학동을 거쳐 이 곳에 온 것이었다. 그는 서울서 대체의학자로서 조계종 종정을 지냈던 윤고암 스님의 주치의 역할을 했다. 88년 서울올림픽이 열렸을 때의 일인데, 당시 급성위경련으로 쓰러진 독일팀 주치의의 아내를 브로치의 핀으로 침을 놓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게 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가 지리산에 온 후 혼자 집을 지었는데, 이이야기는 내가 모일간신문에 쓴적이 있다. 그는 12년 동안 황토집을 지었다. 처음 단칸짜리 아래채를 완성하고 이어 2층으로 된 위채를 지었다. 황토를 짓이겨 떡을 만들어 시나브로 벽을 두드려가며 찍어 붙여 만든 집이다. 방바닥은 황토로 마감하고 장판을 깔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멘트를 바른 것처럼 매끈하고 빤질빤질하다. 2층집은 아직 미완성인데, 영원한 미완성 작품으로 남게 됐다. 백여사는 지압법과 수지침의 달인이었고, 약초전문가였다. 황토미장 기술과 구들 놓는 법의 전문가였다.

만년에 그는 백범과 백기환 선생의 영정을 모신 북한산 사당을 팔았다고 했다. 그가 살고 있는 지리산 부춘골의 집에 그들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마지막 남은 꿈이라고 여사가 나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투사의 딸. 지리산을 지극히 사랑했던 지리산 사람. 민족을 걱정했던 우국지사. 그의 황토집에는 그가 생전에 게양했던 태극기가 아직도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백선생님. 삼가 명복을 빕니다. 명계에서도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천부경을 치고 있겠죠? 오늘은 제가 제대로 치겠습니다.”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 일석삼극무진본(一析三極無盡本) / 천일일지일이인일삼(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 일적십거 무궤화삼(一積十鉅 無櫃化三) /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 대삼합육생 칠팔구운(大三合六生 七八九運) / 삼사성환오칠일 (三四成環五七一) / 묘연만왕만래 용변불동본(妙衍萬往萬來 用變不動本) / 본심본태양앙명(本心本太陽昻明) /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

/이현도 문화특집부장
저작권자 © 경남연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