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소리]다시 생각하는 2·8독립선언

  • 입력 2008.02.11 00:00
  • 기자명 옥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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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8일은 2·8 독립선언일 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3·1운동은 잘 알고 있지만 2·8 독립선언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문 것이 현실이라 아쉬운 마음 금할 길 없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것과 세계 언론들이 약소민족의 독립 및 발언권 요구 등을 집중적으로 보도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재일 유학생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동경 유학생 대부분에 해당하는 600여명이 1919년 2월8일 선언문을 우편으로 동경 주재 각국 대사관·공사관과 일본정부의 각 대신, 일본 귀족원·중의원, 조선총독 및 각 신문사로 보냈고,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던 역사적인 날이다.

이들이 발표한 독립선언서는 이들의 젊은 혈기를 투영이라도 한 듯 일제의 침략은 사기와 폭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직설적으로 고발하면서 1910년 강제로 체결된 한일합병 조약의 폐기와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민족대회 소집을 요구하며 이를 실현하기 까지 혈전도 불사할 것을 선언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날 행사는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지만, 투쟁적이고 체계적이며 동시에 비판적이었던 이들의 2·8독립 선언은 국내의 3·1운동 발단의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국내 3·1운동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 유학생이라면 사회 지식층으로서 안정적이고 부유한 미래가 보장된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장된 부와 명예는 아랑곳없이 자신과 가족의 목숨마저 위태롭게 된다는 엄연한 현실을 뒤로 한 채 독립운동에 과감히 투신, 적지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소리 높여 독립을 외쳤으나 경찰의 강제 해산으로 10명의 실행 위원을 포함한 27명의 유학생들이 검거되는 안타까움을 낳았다.

2·8독립선언 선포 89주년을 맞아 그 역사적 의의가 진정한 평가를 받고, 그 정신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가슴속에 활활 타 올라 '국민을 잘 섬기겠다'는 새로운 각오로 출범하는 새정부에서는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시책이 더욱더 활성화되어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의 삶이 윤택해 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부산지방보훈청 강남욱 선양2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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