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마당]시(詩)와 꽃 이야기

  • 입력 2006.05.03 00:00
  • 기자명 심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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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산과 들에는 연록의 초목들과 노랑, 빨강, 보라의 꽃들이 앞다투어 피고 있다. 꽃들의 색깔이 어디 그뿐이랴.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초목이라도 다 그 색깔, 빛깔이 다르다. 붉은 꽃도 더 붉거나 다른 색깔이 섞였거나 더 밝거나 하다.

어제, 꽃을 두어 포기를 샀다. 노랑, 주황, 황백, 빨강의 색깔이 따로 피기도 하고 뒤섞이기도 한 꽃잎과, 동그란 연록의 작은 연잎 모양들이 꽤나 화려하다. 봄나들이에 나선 여인의 하늘거리며 간질이듯 부드럽게 몸에 가 감기는 옷 같다. 바람에 나붓거리는 모양새가 수십 마리, 나비의 몸짓 같기도 하다.

서점에서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를 사들고 나올 때 기분이다. 백 여 쪽의 가벼운 분량이 좋았고 온통 밝은 빨강으로 메워진 표지가 좋았다. 보고 읽다가 혼자만 갖기가 아까워서 한 권을 더 샀다. 그렇게 보내다 보니 내 소유의 것마저도 없어졌다. 이제는 절판이 되어 서점에도 없어졌다. 질마재 신화가 그렇게 좋았던 것은 그 밝은 빨강의 화려함이 오히려 담박한 장정이 된 것에다 거기에 실린 <신부(新婦)> 때문이기도 했다. 꽃과 풀잎으로 이슬을 먹으면서 큰, 선남선녀의 만남이어서 그럴까. 착하고 순수하기만 한 신랑과 신부의 첫날밤 이야기가 보석같이 영롱한 ‘찬란한 슬픔의 아름다움’으로 그렇게 그 속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저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저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서정주 <신부>)

순수함과 그 순수함이 피어나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움이, 오래 가슴에 맺혔던 슬픔처럼 덜컥 치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아름다움이 지속적인 생명을 갖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초록’과 ‘다홍’의 색 빛깔이 ‘고스란히’라는 다소곳한 느낌의 말을 만나면서, ‘첫날밤’의 ‘첫’이라는 신선함과 그 말소리가 주는 거센 느낌이 어울리어 일으키는 울림이 신부(新婦)의 아름다움을 상상케 합니다. ‘新’이라는 글자의 이슬같은 신선함이 아름다움을 더합니다. 그러나 곧, 뒤미쳐 ‘재’가 되어, 금방 우리의 읽고 보기를 통해 인지되는, 사라져버릴 슬픔이 있어 그것은 아주 조마조마한 아름다움의 짧은 순간이 됩니다. 아름다운 모든 것은 그렇게 단번에 재빨리 ‘폭삭’ 내려앉습니다. 스러지고 사라지는 ‘재’는 우리의 목을 메이게 하는 슬픔이 됩니다. 재로 흙으로 돌아갑니다. 아름답고, 슬픈, 안타까운 죽음이 됩니다.

한련화의 화려한 아름다움이 떠오릅니다. 영국의 한 시인이 4월을 왜 잔인한 달이라고 한 것을 알 것 같습니다. 여리고 아름답고 순수한 모든 것이 고통 받고 스러지는 안타까움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움을 슬퍼하는 시가 아니라 그것은 그저 해마다 피어선 지는데, 순수와 아름다움과 사라지는 모든 것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우리의 안타까운 욕망을 말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명형대 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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