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산책]어머니, 그 더러운…

  • 입력 2006.05.02 00:00
  • 기자명 심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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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 그 이름 참 더러운 게지…”

우리의 어머니들이 깊은 그림자가 고인 눈으로 한숨처럼 내뱉는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이름이 ‘어머니’라니…‘어머니’라는 이름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배웠는데 말이다.

아무리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시들고마는 것인데 어머니의 사랑만은 영원히 푸르게 아름답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어머니이름’을 두고 ‘더럽더라’고 술회하는 어머니의 이마엔 주름골이 깊다.

어머니란 자리는 끊임없는 ‘포기’와 끊임없는 ‘비움’과 끊임없는 ‘태움’을 요구한다. 이 끊임없는 희생의 요구에 ‘더럽더라’고 하는 말은 ‘찢기듯 아프더라’의 역설적 표현이 아니겠는가.

어느 여인은 ‘엄마’라는 호칭을 듣는 것이 너무 좋고 행복하단다.
그래서 시어머니의 폭언과 폭력에도 담담할 수 있고 남편의 외도와 손찌검도 묵묵히 받아넘길 수 있더란다.

세상 어떤 영화라도 ‘엄마자리’를 포기할 만큼 아름답고 귀한 것은 없더란다.
그렇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엄마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꿈꾸어오던 화려한 의상과 스포트라이트를 지워버린다. 그 정도의 능력과 자질이라면 국회의원 아니 대통령도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엄마자리’를 위해서 유행가 가사처럼 가시길을 걷고 서릿길, 빙판길도 마다않으며 먼산바라기를 하고 보낸 세월은 또 얼마나 되는가.

어떤 어머니는 “나 죽거든 내 가슴을 열어 보거라, 새까맣게 타서 재만 있을 게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어머니의 베풂은 ‘죽음능력’이라 하는 것이다.

시인 이경림의 <아홉개의 상자가 있는 에필로그>(시집「상자들」)중 <상자9>를 보면 『여성은…태어날 때부터 몸 속에 ‘자궁(子宮)’이라는 집 한 채를 지니고 나온다…순전히 타인을 위하여 지어진 집…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남몰래 피를 흘리는 고통을 감수한다…‘에미’라는 이름…제 생을 다 내어주기 때문인지…결국에는 자신을 후루룩 들이킬 블랙홀인…어미로서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슬픈 본성이 시대가 아무리 발달해도 끝없이 슬픈 어미들을 낳고…』라고 노래하고 있다.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이쯤되면 ‘에미’라는 말이 얼마나 더러운 건지, 그 역설에 충분히 수긍가지 않는가.
여성이 만약 ‘어머니자리’가 아닌 ‘아내자리’에 비중을 두었더라면 아마 많은 여성들이 가정을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에미이기에, 자궁을 지닌 여성이기에 그 많은 슬픔과 한을 꾸역꾸역 삼키며 버텨낸 것이 아닌가.
병든 조개가 진주를 낳듯 ‘어머니’란 보석은 슬픔과 한이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요사이 연일 보도된 앨리슨래퍼 모자의 활짝 웃는 모습이 금강석처럼 빛난다. 팔다리가 기형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낳아 건강하게 키워낸 힘이 바로 여성만의 모성본능 아닌가.
장애인임에도 사진작가이자 구족화가로 활동한다는 것은 인간승리의 모습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것, 그리고 입으로 기저귀를 갈고 우유를 먹일 수 있었던 건 바로 자궁을 가진 모성이 창조해낸 것이니 가히 신적 경지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래서 어머니는 신(神)이라 한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의 ‘죽음’의 힘으로 ‘나’라는 존재로 살아 있음을 부정할 자가 어디 있는가.
가정의 달 오월을 맞아 나도 어머니를 불러본다.
“어머니, 아니 엄마아….”

강정이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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