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의생각](35) 좌충우돌 베트남 여행기6-밤기차를 타고 안개도시 '싸파'로 가다

냄새와 불편함에 잠 못 이뤘던 '싸파'행 밤기차

  • 입력 2008.05.16 00:00
  • 기자명 문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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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꼭에서 하노이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쌀국수로 급히 저녁을 때우고 V여행사로 배낭을 찾으러 갔다.

한국인 사장님이 반갑게 일어나 맞으면서 오늘 여행 재미가 어땠는지 묻는다.
팁 때문에 겪은 황당한 일을 이야기하자 너털웃음을 웃는다. 베트남에서는 흔한 일이라며 땀꼭은 원체 관광객이 많은 곳이라 그러니 기분 좋게 이해하라며 냉장고에서 차게 식힌 생수를 내준다.

‘라오카이’(Lao Cai)행 기차 출발시간은 밤 9시 15분. 다른 승객들이 몰리기 전에 미리 기차에 올라 자리잡고 씻고 잘 준비를 하는 편이 좋을 거라는 충고에 8시경 역으로 나갔다.
베트남 북부 ‘싸파’(Sa Pa) 지방은 고산지대 소수민족들의 생활을 볼 수 있는 곳이면서 산세가 높고 경치가 수려하며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라 예술가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싸파’에 가기 위해서는 ‘라오카이’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하는데, 하노이에서 라오카이까지는 - 기차 등급에 따라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 대략 9시간쯤 걸리기 때문에 밤기차를 타고 움직이는 게 제일 낫다고 들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미리 나온 승객들이 여기저기 삼삼오오 떼로 모여 있다.
플랫폼 한 중간에 아침식사용 바게트를 파는 손수레가 서 있다. 베트남도 프랑스 식민지였던 곳이라 곳곳에서 바게트 파는 상인을 쉽게 만나게 된다.

윤 선교사는 밤새 출출할지 모른다며 바게뜨를 사서 배낭에 챙겨 넣는다. 15분쯤 기다리자 차장이 나와 표를 확인하고 승객을 태운다.
우리가 타는 민영열차는 국영열차보다 값이 5배 정도 비싸다.

당연히 베트남 내국인보다는 외국인들이 주로 많이 이용한다. 국영열차 역시 가격에 따라 등급이 나눠져 있지만 아무래도 민영열차가 더 빠르고 깨끗하고 안락하다.
기차 내부는 원목으로 장식되어 있다. 객실마다 2층 침대가 둘씩 들어있다. 4인용 객실인 셈이다. 창가의 테이블 위에는 노란 꽃봉오리 모양의 유리 램프가 놓여 있다. 램프 불빛 때문에 객실 분위기가 편안하게 느껴진다.

라오카이까지는 9시간 걸린다고 했으니까 도착하면 새벽 5시 30분쯤이겠다.
싸파에서 묵을 호텔을 예약하면서 라오카이 역까지 미니버스를 보내달라고 했으니 그동안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된다. 기차에서 내리면 호텔 미니버스를 찾아봐야지.
나는 아무래도 예약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예약병자’인 모양이다.

보통 배낭 여행자들은 일단 목적지에 가보고 거기서 마음에 드는 숙소를 찾아 잠자리를 구한다고 하던데, 나는 예약 없이는 불안해서 움직일 수가 없다.
‘일단 잠자리는 확보해 놔야 마음 놓고 움직이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천생 타고난 유목민은 못 되는 것이다. 어디든 안심하고 머물 곳부터 먼저 찾아놔야 안심이 된다.
그런데, 만약 ‘싸파’의 호텔도 하노이 호텔처럼 엉망이면 어떡하지? 그곳 역시 사진만 보고 덜렁 예약을 해 놨는데 ….

윤 선교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키가 족히 190센티미터는 넘어 보이는 꺽다리 서양 남자 2명이 노크를 하고 들어온다.
미국인이란다. 보스톤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는데 지금은 홍콩에 교환학생으로 나와 있다고.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첫 마디부터 ‘방이 작다, 침대가 작다’고 난리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중 1명은 얼핏 보기에도 침대 길이보다 키가 더 커 보인다. 어떻게 잘 거냐고 물어보자 애교스럽게 웃으면서 웅크리고 자는 시늉을 해 보인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덩치에 비해 표정들이 순진해 보인다.
그런데 이 남학생들 정말 말이 많다. 끊임없이 조잘대는데 대충 들어보니 여태 여행 다니면서 만난 친구들 이야기다. 걔는 똑똑했고 걔하고는 메일주소를 주고받았고 걔는 뭘 공부한다더라. 주로 여자애들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고 있다.

몇 시에 잘 건지 물어보자 우리가 자면 그때 자기들도 잘 거란다. ‘그래? 그럼 우리는 10시에 잘 거다.’ 하고는 냉큼 세면장에 가서 세수하고 양치질을 한 후 잠자리에 들 준비를 끝냈다. 새벽 5시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일찍 자야지.

그나저나 베트남에서는 객실 배정할 때 남녀 구분을 안 해주는 모양이다. ‘남녀칠세부동석’을 당연시하는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우리로서는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지만 하는 수 없지.

그런데, 밤새 덜컹거리는 레일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게다가 기차가 움직일 때마다 토하듯 밀어내는 역한 기름 냄새까지!
사람마다 민감한 부분이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진동에 약하고 어떤 사람은 소리에 민감하다.
나는 냄새에 민감한 편이다. 어릴 때부터 하도 냄새를 잘 맡아서 식구들이 별명을 ‘개코’라고 지어줬을 정도다. 아침마다 나를 깨운 건 8할이 음식 냄새다. 보통 사람들은 음식 냄새를 좋아한다지만, 한창 아침 단잠에 취해있는 나에게 음식 냄새는 차라리 고문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열차 객실로 들어오는 기름 냄새는 보통사람들은 개의치 않을 정도로 약한 냄새다. 그러나 그런 냄새도 나한테는 독가스다.

우선 1층에 자리를 잡은 게 실수다. 윤 선교사가 나를 배려한답시고 비싼 1층 침대를 내줬는데 - 1층이 2층보다 비싸다 - 하노이로 돌아올 때는 내가 2층에 올라가서 자야겠다. 그런데 윤 선교사가 싫다고 하면 어쩌지?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 자는데 나만 깨어있다. 기차가 정차하면 잠깐 토막잠이 들었다가 움직이면 다시 잠이 깬다. 하노이에서 라오카이까지, 어둠 속에서는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문득문득 커튼 사이로 부나방처럼 불빛이 밀려들어올 때면 잠시 눈을 붙였다가 했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곽재구, ‘사평역에서’ 중 일부

잠이 오지 않으니 온갖 상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세 사람의 고른 숨소리가 더욱 옛 생각에 빠져들게 만든다.

대학 4학년 겨울 크리스마스 전야, 집에는 교회에 간다고 거짓말하고서 혼자 무작정 경부선 열차를 타고 떠났던 기억이 있다. 지금 왜 그 생각이 나는 걸까?
사실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성탄 행사에 맞춰 교회로 가다 보니 불현듯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무작정 기차역으로 나가 표를 끊은 것이 충북 영동이었다. 경부선의 한중간에 있는 소도시.
영동역에 내렸을 때 느낀, 낯선 지방 소도시에서의 적막감은 의외로 편안했다.

읍내 여기저기 눈길 가는 곳마다 드문드문 헤어진 담요처럼 잿빛으로 바랜 눈이 쌓여있었다.
대합실 바깥에서 다가와 내 손을 잡았던 아주머니들. ‘깨끗하고 따뜻한 방 있어요.’라고 속삭이면서 내 손을 잡아끌던 그 차가운 손의 감촉은 정말이지 잊을 수가 없다.
그때 기차여행에 맛을 들인 때문인지, 대학원 때도 가끔 시간이 나면 무작정 기차역으로 나가 완행열차를 타고 떠나곤 했다.

새 역을 지날 때마다 새로운 승객들이 기차에 올라타곤 했다. 완행열차로 통학하는 까까머리 중학생들, 보퉁이 가득 야채며 생선이며 싸다니던 촌 아지메들. 진례, 낙동, 한림정 ….
이름만 들어도 예쁘기만 한 작은 시골의 대합실들. 밤새 덜커덩거리는 기차소리를 듣노라니 오래 전 기찻길의 추억이 새삼스럽다.

새벽 5시 20분. 라오카이 역에 내리자 날씨가 꽤 쌀쌀하다. 한국의 초봄 날씨나 진배없다더니 과연 춥다. 두꺼운 점퍼를 준비해 왔기에 망정이지 낭패를 볼 뻔했다.
배낭에서 새 점퍼를 꺼내 입고 여태까지 입고 있던 얇은 트레이닝 점퍼는 윤 선교사에게 빌려주었다.

평균 기온이 10~15°C 전후라고 누누이 일러주었건만, 입던 반팔 차림에 스웨터 하나만 걸치고 오다니.
벌벌 떨면서 미니버스를 찾으니 역사 입구에 C호텔 종업원이 ‘Miss Key’라고 쓴 종이를 들고 서 있다. ‘Key’ - 내 이름 첫 글자다. 왠지 느낌이 좋다.
‘싸파’에서는 처음부터 잘 맞는 자물쇠에 제대로 열쇠를 잘 꽂은 것 같은 느낌이다.

태국 국립 씨나카린위롯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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