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비적 여성캐릭터 탄생했다, 뮤지컬 ‘레드북’

보수적 빅토리아 시대…야한 소설 쓰는 엉뚱한 ‘안나’
건강하게 일깨운 본능·멋진 여성 인해 변화하는 남성

  • 입력 2017.01.18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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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레드북’(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 뮤지컬 ‘레드북’(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레드북’은 기념비적인 여성 캐릭터를 탄생시켰다는 점만으로도 창작 뮤지컬계가 오르가즘을 느낄 만한 작품이다.

 신사의 나라 영국, 그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으로 평가받는 빅토리아 시대를 살아가는 안나는 “난 슬퍼질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한다”고 가감 없이 말한다.

 여성을 남성의 부속품처럼 취급 받던 그 때에 안나는 야한 소설, 즉 레드북을 쓰는 엉뚱한 소설가다. 그런 안나를 사랑하지만 고지식한 변호사 브라운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쪽으로 그녀를 변화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안나 모습 자체를 받아들인 뒤 오히려 위기에 처한 그녀를 구한다. 악영향만 끼칠 듯하던 레드북은 보수적인 사람들과 마음을 조금씩 변화시키며 긍정적인 영향을 드러낸다.

 100년간 아무 변화가 없던 프랑스의 한 마을에 어느 날 신비의 여인, 비안느가 딸과 함께 나타나 초콜릿 가게를 열어 사람들이 사랑과 정열에 빠져들게 하는 영화 ‘초콜릿’(감독 라세 할스트롬·2000)이 언뜻 떠오르기도 한다.

 뮤지컬에서 레드북은 성관계를 포함해 남녀의 사랑을 솔직하게 그리며 엄숙함에 눌려 있던 당시 사람들의 숨겨진 욕망과 본능을 건강하게 일깨운다.

 초콜릿보다 더욱 황홀함을 안기는 레드북을 쓴 안나의 당당함은 위선이 깃든 정숙함의 성채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굳센 창이 된다. 신사의 도리를 외치나 사실은 여성에 대한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 욕망을 채우는데 급급한 남성들은 결국 속절없이 무너진다.

 그간 뮤지컬에서 기능적이거나 수동적으로 그려진 여성 캐릭터가 ‘레드북’에서는 이처럼 활력을 얻는다.

 여성 혐오 등 아직도 사회적인 약자로 남아 있는 증거들로 점철된 2017년 대한민국 현재에 통쾌한 울림을 안겨주는 이유다. 뮤지컬을 보는 내내 이 시대의 안나들을 응원하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멋진 여성 캐릭터로 인해 변하려고 노력하는 남자 캐릭터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로맨틱 코미디의 전범이 된다.

 유리아는 시원한 연기와 가창력으로 안나 역에 덧없이 잘 어울린다. 주로 그간 무거운 역을 맡았던 박은석은 어수룩하지만 진심이 드러나는 브라운을 맞춤옷처럼 입었다. 여성문학회 ‘로렐라이 언덕’ 설립자이자 입체적인 여장 남자 로렐라이를 연기한 지현준의 리듬감과 능청스러움, 대학로에서 단연 최고의 할머니 배역의 김국희도 기억해야 한다.

 스테디셀러 창작뮤지컬로 자리매김할 태세인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작가 한정석, 작곡가 이선영의 신작으로 연출 오경택, 음악감독 양주인 등 조력자 면면도 화려하다.

 한겨울에 봄기운을 물씬 품고 있는 사랑스런 팝 멜로디의 ‘사랑은 마치’, 단숨에 판타지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낡은 침대를 타고’ 등 넘버도 처음부터 귀에 척척 감긴다.

 ‘레드북’은 한국 뮤지컬 역사에 톺아볼 만한 캐릭터를 중심으로, 초연 창작도 이처럼 완성도를 갖출 수 있다는 걸 증명한다. 올해의 뮤지컬이 1월부터 벌써 당도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16 창작산실 뮤지컬’ 부문 선정작으로, 오는 22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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