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신병교육기간을 회고하며

  • 입력 2018.10.31 18:27
  • 수정 2018.10.31 18:38
  • 기자명 /경남연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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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억규 해병대 창원시마산연합원로자문회 사무국장
▲ 박억규 해병대 창원시마산연합원로자문회 사무국장

 석류알 처럼 터질듯 부풀은 홍안의 20대, 커다란 포부를 한아름 안고 1960년 11월 4일 600여 명 동료들과 철마로 굴러간 곳은 진해 해병훈련소다.

 고요한 밤, 소란함도 아랑곳 없이 곤한 잠에 빠져든 수 많은 병사들, 검은 밤의 대지를 뚫고 촉촉히 젖어드는 해안풍과 거친 파도소리 등 모든 광경들은 하루 종일 긴장과 호기심으로 초조했던 몸과 마음을 살포시 풀어주는 것 같았다.

 ‘귀신잡는 해병’이 돼 보겠다고 수 많은 경쟁을 뚫고 합격한 나는 진초록의 부풀은 마음으로 근사한 해병을 다시 한번 그려 보지만 웬지 두려움과 후회는 마음 한 구석에 지워지지않고 머물고 있었다.

 가입대 1주일 후, 빡빡머리에 군복으로 갈아입고 오른 손을 들어 참된 해병이 되겠다고 굳에 맹세했다.

 진해 훈련소에서 일반학교육 3개월, 상남훈련소에서 전술학 1개월, 모두(16주) 4개월 신병교육을 마치고 드디어 자랑스런 견습해병이란 깡통계급장 1개를 가슴에 달았다.

 그리고 배치된 곳은 한국 함대 사령부 해병 제1상륙사단 근무대대 본부중대 본부에서 신고식과 새로운 실무 시집살이가 시작됐다.

 신병교육시절 ‘초조와 공포를 잊기 위해 깊숙히 감춰 놓은 담배 꽁초를 피우다 소대장께 발각돼 모질게 매를 맞던 기억’, ‘매일 장구 손질 불량과 병기손질 불량으로 나를 울리던 M1 소총’, ‘고된 훈련 일과를 마치고 곤히 잠든 새벽 1시, 저승사자보다 더 무서운 병사떠나 15분전을 알리는 비상 호각소리’, ‘내무반 밖 꽁꽁 얼어 있는 방화수 얼음깨고 교번 순으로 입수하던 때’와 상남훈련소 전술학교육중 동기생 한 명이 훈련에 적응 못하고 탈영하던 날, 중대장께서 출근해 혹한 추위임에도 불구하고 팬티바람에 단독 무장을 지시했다.

 연병장에 집합한 동료들은 중대장 인솔하에 훈련소에서 4Km가 넘는 성주사역까지 구보를 했다. 이를 본 지역 주민들은 전·후 사정도 모른체 “이 처럼 매서운 추위를 무릎쓰고 강한 훈련을 받기에 강한 해병이 탄생한다”며 속 모르게 속삭이던 주민들의 말, 비포장도로에 발바닥에 와 닿는 작은 돌맹이와 모래알갱이들은 바늘방석인들 그렇게도 아팠을까?

 또 전술학교육 다 마치고 진해훈련소로 복귀 할 때는 장복산 꼭대기(일명 눈물고개)에서 후배기수들은 눈물, 콧물이 번벅이 돼 무언의 시선으로 동료들을 주시하던 기억들은 반세기가 훨씬 넘은 지금도 ‘해병 혼’과 함께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오히려 내 일생동안 삶의 무게를 한 층 더 가볍게 해주고 있다.

 이후에도 희비 쌍곡의 수 많은 세월 속에 좌절과 실망, 보람과 환희가 반복됐지만 드디어 1963년 4월 28일, 30개월 시집살이와 더불어 국방 의무를 충실히 마칠 수 있었다.

 이같은 결실은 같은 길을 걸었던 선배와 후배들의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이 있었기에 값진 추억으로 남게됐다고 자부한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 동료들아, 아니 전우들아 정말 보고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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