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구의 아름다운 우리 문화유산을 찾아서] 밀양(3)

밀양인 자랑거리 호국성지 표충사
나라 위기 때마다 땀흘리는 표충비

  • 입력 2008.10.16 00:00
  • 기자명 경남연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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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원 사찰, 사명대사 호국성지, 많은 문화유산의 표충사

1) 재약산 표충사의 보물들

밀양시에서 동북쪽으로 27km떨어진 단장면 구천리 재약산의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승속을 초월하여 국난 극복에 앞장섰던 당대의 고승 사명당 송운대사의 비상한 법력과 호국불교의 충혼이 서린 역사적 명찰입니다. 표충사 경내에는 사명당의 사당인 표충사(表忠祠)와 유물 기념관이 있어 그의 거룩하고 장엄했던 생애를 일어주고 있습니다.

1989년 1월에 시로 승격된 밀양 사람들은 예로부터 이 표충사를 영남루, 아랑각과 더불어 세 가지 큰 자랑거리로 삼고 있습니다. 사명대사 유정은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에서 태어났습니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국가에서 명명한 절입니다. 654년(태종무열왕 1)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죽림사라 하였으며, 829년 인도의 승려 황면선사가 현재의 자리에 중창하여 영정사라 이름을 고치고 3층 석탑을 세워 부처의 진신 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전합니다. 신라 진성여왕 때에는 보우국사가 한국 제일의 선수행 사찰로 만들었으며, 1286년(충렬왕 12)에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국사가 1000여 명의 승려를 모아 불법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1839년 사명대사의 법손인 월파선사가 사명대사의 고향인 무안면에 그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세워져 있던 표충사를 이 절로 옮기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라 고치게 되었습니다. 이보다 앞서 1715년에 중건한 사실이 있으나 1926년에 응진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문화유산을 보면 국가지정 문화재로 국보는 국보제 75호 표충사 동함은향완 1점, 보물로는 보물 제 467호 표충사 삼층석탑 1 점, 중요민속자료로 제 29호인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 1점,이 있고 지방지정 문화재로는 경남 유형문화재로 제 14호인 표충사 석등등 15점,

경남 문화재 자료로 제 141호인 표충사 팔상전등 3점등으로 지정 문화재만 21점으로 찬란히 빛납니다.

‘829년(통일신라)에 한 범승이 서역에서 왔는데 사람들이 이름은 모른 채 그저 얼굴이 노랗고 머리가 벗겨진 노인이라고 하여 황면노독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마을에 괴질이 돌자 황면노독이 샘 하나를 가리키면서 “저 물을 마시면 나을 것이오” 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가 시키는 대로 그 샘물을 길어다 마시니 과연 병이 나았으므로 감사의 표시로 재물을 거두어 절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절 이름을 영정사, 산 이름을 재약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재약산이란 곧 산 전체에 약이 실려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설에 따르면 표충사는 본래 654년(무열왕 1)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죽림사가 전신이라고 했습니다. 그 뒤 홍덕왕 때 왕자의 난치병을 이곳 영정약수로 고쳤다고 하여 재물을 내려 큰 절로 중창하고 영정사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상고하기 어렵고, 이후 영정사는 889년 보우국사가 500여 명의 문도를 거느리고 와서 머물렀으며, 고려 때인 1067년에는 해린 국사가 와서 있었고, 1286년(충렬왕 12)에는 일연선사가 제자 1000여 명을 거느리고 온 데에 이어 다시 4년 뒤에는 천희 국사가 와서 수행함으로써 당대 제일의 선찰로 이름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이들 고려시대 4국사의 법손들이 머물면서 불법을 닦아왔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재약산영정사고적』에 따르면 그 뒤 1600년에 전라도에서 찾아온 혜징 스님이 폐사를 재건할 뜻으로 원근을 돌며 시주를 모아 10년째 되던 해인 1610년(광해군 2)에 금당과 법당을 지었으나 노환으로 더 이상 불사를 계속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재가 불자들이 혜징의 뜻을 이어 20여 년간에 걸친 공사 끝에 1669년 본래의 모습을 거의 복구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오랜 시간을 들여 힘겨운 불사 끝에 중창된 영정사는 불과 10년 만인 1679년에 큰 불이 일어나 법당과 명부전 등이 소실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이 영정사가 표충사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1839년(헌종5). 영정사가 폐사될 위기에 처하자 사명당의 8대 법손인 천유대사가 앞장서서 사명당의 고향 무안면 고라리 삼강동에 있던 그의 사당 표충사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절 이름도 아예 표충사라고 개칭한 다음부터였습니다.

원래 사당 표충사는 1618년에 사명당의 출생지인 무안면의 백하암 자리에 세워졌었습니다. 이 백하암은 사명당이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고자 지은 작은 암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 세월이 흘러 사당이 퇴락하자 1742년(영조 18)에 사명당의 5대 법손인 남붕선사가 표충사를 중창하면서 대사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를 세웠으니 그것이 곧 오늘날 유명한 ‘땀 흘리는 비석’입니다. 그 이전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고 비석이 세워진 뒤에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렸다는 첫 기록은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기 7일 전이며 그때 3말 1되의 땀을 흘렸다고 합니다.

사명대사의 영정을 중앙에 모시고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기허당 영규대사의 진영을 좌우에 모신 표충사는 홍제교와 일주문을 들어서면 근래에 신축한 유물관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유물전시관에는 국보 제 75호인 청동함은향완을 비롯해 많은 문화유산이 보관 전시되고 있는데 특히 사명대사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당시 최고 권력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선물받은 연엽 바리 두가지도 있습니다.

표충사 아래의 사하촌을 거쳐 가을바람과 솔 향기를 함께 마시면서 표충사 바로 아래 주차장에서 표충사 경내로 진입하게 됩니다 일주문을 지나 계단을 건너 사천왕문을 지나면 마침내 표충사의 빛나는 전각들과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잔디밭으로 된 절마당은 좀 특이하지만 정결한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먼저 표충 서원과 유물전시관 표충관이 나타나고 탑과 석등을 거쳐 주전인 대광전에 도달하게 되며 수충루, 팔상전 , 산신각, 우화루 , 범종각, 관음전, 명부전, 만일루, 영각, 관음전 등의 빛나는 전각들이 나타납니다.

표충사의 가람 배치는 특이한 양상을 나타내는데 주전(대광전) 앞에 있어야 할 탑과 석등이 주전과 떨어진 곳에 있고 각 전각들도 주전과 나란히 있으며 서쪽으로 향해 있어 전형적인 가람 배치와는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문화재 답사가 / 굿모닝요양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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