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 김해를 사랑한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 2부

  • 입력 2020.07.01 14:31
  • 수정 2020.07.08 10:56
  • 기자명 /한송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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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鷄林(慶州) 判官 隱 田祿生 詩
계림(경주) 판관 야은 전녹생 시
‘贈 金海妓 玉纖纖(증 김해기 옥섬섬)’

海上仙山 七點靑(해상선산 칠점청)
바다위 신선이 사는 칠점산은 푸르고
琴中素月 一輪明(금중소월 일륜명)
거문고 타는 여인은 둥근 달같이 아름답구나
世間不有 纖纖手(세간불유 섬섬수)
이 세상에 옥섬섬의 고운손(섬섬옥수) 없었다면
誰肯能彈 太古情(수긍능탄 태고정)
어느 누가 태고의 정*을 연주할 수 있겠는가

 

 *태고의 정 : 옥섬섬의 거문고 솜씨가 너무 뛰어나 마치 옛날에 가락국 2대왕 거등왕과 칠점산 선인이 거문고를 타며 즐긴 정취를 다시 보는 것 같다는 표현. 

 

 야은 전녹생 선생은 1318년(고려 충숙왕 5년) 전라도 담양에서 태어났다. 야은은

▲ 玄林 尹昌洙(현림 윤창수)前 김해경찰서장(제53대)
▲ 玄林 尹昌洙(현림 윤창수)前 김해경찰서장(제53대)

5세 때 책을 읽고 8세 때 시를 지었다고 하며 충혜왕 때 문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쳐 1357년(공민왕 6년) 鷄林判官(계림판관)을 지냈다.

 1361년 전라도 按廉使(안렴사)때 개경(개성)에 홍건적이 쳐내려와 공민왕이 남쪽으로 파천(피난)하니 ‘侍御史(시어사)’로 이색(호는 목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3은의 한사람) 등과 같이 어가를 호위했으며 잘못된 제도나 각 도 수비대의 폐해 등을 고칠 것을 간언하고 탐관오리를 밝혀내어 벌하는 등 충직하면서도 강직하게 처신했다고 하며 공민왕 때는 벼슬이 대사헌과 문하평리까지 지내고 推忠贊化 輔理功臣(추충찬화보리공신)의 호까지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우왕 초 간신 이첨과 전백영의 모함으로 최영의 국문을 받고 귀양 중에 별세했으며 1730년(영조6년) 후손인 전만영이 정리한 전녹생의 문집 ‘야은일고’가 남아있다.

 위의 시는 1357년(공민왕 6년) 계림판관(지금의 경주지역) 으로 있을 때 관할 지역인 김해를 방문해 김해기생 옥섬섬을 만나 거문고 타는 것을 보고 ‘증 김해기 옥섬섬’이라는 시를 남겼으며 그 후 10여년 뒤 경상도 都巡問使(도순문사)로 합포(지금의 마산지역)에 와서 예전의 情理(정리)를 변치 않고 이미 나이가 든 옥섬섬을 불러 곁에 뒀다는 양반 사대부와 기생의 품격 있는 사랑이야기가 지금도 마산과 김해지역에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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