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 칼럼] 봄동. (3)

  • 입력 2023.03.06 12:01
  • 수정 2023.03.07 11:09
  • 기자명 /경남연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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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호 국악인
▲ 김준호 국악인

 ‘할머니 청국장, 할머니 순두부, 할머니 밥상, 할매 칼국수, 할매 추어탕, 할매 손두부 할매 국밥, 할매 매운탕’과 같이 식당 이름에 ‘할머니, 할매’가 붙으면 일단 절반 이상은 기본으로 먹고 들어갔다.

 할머니의 오랜 관록과 정성과 손맛으로 손님들에게 편안하고 익숙한, 맛난 음식을 제공한다는 일종의 보증수표와 같았다.

 무슨 음식이든 할머니가 만들고, 할머니가 끓이고, 할머니가 간을 한 것은 오랜 숙성의 맛이 전해지고, 자꾸 더 먹고 싶게끔 입맛을 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나물 맛도 손맛이었다. 나물은 나+물의 합성어다.

 ‘나’는 ‘나다’의 어근인 ‘낳’에서 온 말로 ‘땅에서 나온 것’을 의미하고, ‘물’은 상고어에서 손을 지칭하던 ‘맏’에서 변이한 말로 ‘조물조물, 주물럭거린다’라는 표현이었다.

 계량을 헤아리는 ‘그램, 스푼, 컵’ 등은 없어도 오랜 경험으로 대충 손으로 헤아려 넣는데, 그 맛이 훌륭할 때 “역시 할머니 손맛이야”를 외쳤다.

 아무리 어머니가 나물을 잘 조물조물해도, 봄동 겉절이만큼은 할무니가 쪼물쪼물 무친 그 손맛에는 못 따라갔다.

 할무니의 봄동 겉절이는 항상 텃밭에서 시작했다.

 내가 살던 고향집은 방 2개에 정지가 딸린 안채와 작은방에 고방이 달린 아래채 그리고 소, 돼지, 닭을 키우고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헛간채가 있었다.

 그리고 가족들이 사시사철 언제든지 싱싱한 채소를 먹을 수 있게끔 공급해 주는 텃밭이 있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삼밭’이라 불렀다.

 작은 삼밭에는 배추, 열무, 무, 상추, 갓, 오이, 가지. 고추, 소풀, 당근, 시금치, 토마토, 봄동, 파, 마늘, 방아, 등 우리 식구들이 먹는 채소가 항시 풍부하게 자라고 있었다.

 밭이 따로 있었지만, 걸어서 20분은 족히 가야 하는 먼 곳이라 대부분 우리 식구들 먹을거리는 삼밭에서 해결했고 밭에서 키우는 것은 시장에 내다 파는 채소나 콩, 팥, 고구마, 감자 같은 잡곡 종류였다.

 삼밭도 겨울에는 삭막했다.

 오직 살아있는 것은 볏짚으로 덮여 있는 봄동과 시금치가 유일했다.

 그것도 얼어서 말라비틀어진 것이 반이 넘었다.

 땅바닥에서 그 모진 바람과 눈을 견딘 봄동은 구석구석 흙이 많이 묻어 있었다.

 할무니는 그리 크지 않은 보들보들한 봄동을 툭 베어다가 일일이 잎을 떼어 깨끗이 씻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우물물에 봄동을 씻으며 “이기 보약이다, 보약”이라는 말씀을 몇 번을 중얼거리셨다.

 물기를 다 털어내 큰 양푼에 담고 이 항아리 저 항아리를 뒤져 이것저것 눈대중으로 어림잡아 양념을 넣었다.

 봄동은 그 자체로 고소하고, 아삭하고, 달짝지근한 맛이 나기 때문에 양념을 세게 하면 도리어 본연의 맛을 버렸다.

 할무니는 수십 년의 내공이 쌓여 그램이니 스푼이니 하는 계량이 필요가 없었다.

 그저 손 감각과 시각 그리고 경험에 의존했다.

 지난해 봄에 담근 멸치젓에 마늘 다짐, 파, 고춧가루를 넣어 손으로 슬슬 주무르고 마지막으로 참기름, 통깨를 넣고 가볍게 뒤적거려주면 끝이었다.

 “人生適口是眞味(인생은 제 입에 맞으면 그게 진미이거늘) 咬菜亦自能當肉(채소를 씹어도 고기만 못하지 않다네) 我園中有數畝餘(내 집 동산에 몇 이랑 빈터가 있어) 年年滿意種佳蔬 (해마다 넉넉히 채소를 심는다네)”
-서거정(徐居正, 1420~1488)

 할무니들의 손에는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MSG를 능가하는 ‘감미기(甘味氣)’가 나오는 것이 확실했다.

 할무니의 빠른 손놀림과 그윽한 손맛으로 뚝딱 차려진 ‘봄동 겉절이’ 밥상은 겨우내 겨우내 시어빠진 묵은 김치와 동치미에 물린 우리의 입맛을 금세 확 돌려놨다.

 봄동 겉절이의 화룡점정은 비빔밥이었다.

 몸이 저절로 저절로 밥을 비벼 먹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마력이 있었다.

 비비는 밥도 밥도 하얀 쌀밥이면 맛이 덜했고, 보리와 쌀이 적당히 섞인 상반지기 잡곡밥이라야 더 맛났다.

 비빔밥에는 고추장이라는 말도 봄동에는 해당하지 않았다.

 겉절이 상태에 그대로 밥만 넣고 비벼야 제맛을 살렸다.

 아삭아삭 씹히는 달달한 봄동 맛과 짭조름한 젓갈 맛과 매콤하고 알싸한 양념 맛에 톡톡 터지는 깨와 참기름의 고소한 맛이 입안에 봄을 부르는 향을 가득히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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