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2023년 끝자락에서 후안무치(厚顔無恥)를 보다

  • 입력 2023.12.25 11:32
  • 수정 2023.12.25 19:38
  • 기자명 /노종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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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욱
노종욱

 옛날 중국의 하나라 계(啓) 임금의 아들인 태강은 정치를 돌보지 않고 사냥만 하다가 끝내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난다.

 이에 그의 다섯 형제는 나라를 망친 형을 원망하며 번갈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들의 노래는 모두 서경(書經)의 오자지가(五子之歌) 편에 수록돼 있는데, 그중 막내가 불렀다고 하는 노래에는 이러한 대목이 보인다.

 ‘만성구여(萬姓仇予), 여장주의(予將疇依), 울도호여심(鬱陶乎予心), 안후유(顔厚有).’

 ‘만백성들은 우리를 원수라 하니, 우린 장차 누굴 의지할꼬. 답답하고 섧도다! 이 마음, 낯이 뜨거워지고 부끄러워지구나.’

 후안(厚顔)이란 ‘두꺼운 낯가죽’을 뜻하는데, 여기에 무치(無恥)를 더해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로 자주 쓰인다.

 이는 ‘낯가죽이 두꺼워서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사람’을 가리킨다.

 지난 20일 산청군의회 제294회 제2차 정례회 제3차 본회의에 참석한 산청군의회 의원들은 주민의 대표가 아니었다.

 선비의 고장 산청의 정신도 없었고, 남명 조식 선생의 경의사상(敬義思想)도 없었다.

 이날 정례회에서 2024년 산청군 본예산이 통과됐다. 겉으로는 의원들의 예산 집행에 대한 찬반 토론을 거치고 의원들의 투표를 통해 평화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니 산청군의회의 무능함과 존재 이유에 대한 깊은 고민과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 주는 날이었다.

 지난 12일부터 15일까지 산청군의회는 집행부가 제출한 예산을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심의를 통해 군민들에게 꼭 필요한 예산과 불필요한 예산으로 구분 지었다.

 또한 의원들 간의 상호 협의를 통해 조정 과정을 거쳐 경중(輕重)과 더불어 우선순위를 정해 예산 집행의 효율을 높이는 고민을 했다.

 하지만 예결위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본회의 때 산청군 의원들이 보여주는 형태는 참으로 경이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의회의 기능 중 하나는 집행부의 견제이다. 또한 민의를 대표한다.

 하지만 이날 산청군의회는 뭔가에 사로잡힌 듯 무기력한 거수기에 지나지 않았다.

 오죽하면 반대 토론에 나선 한 의원이 예산 심의 과정에서 보여준 동료 의원들의 구태의연하고 잘못된 모습들에 고해성사에 가까운 절규를 토해냈을까.

 기초의회(基礎議會)는 주민을 대표해 각 기초자치단체의 중요 사항을 최종 심의·결정하는 의결 기관을 말한다.

 그 권한에는 예산·결산의 심의·의결 기능, 조례 제정의 입법 기능, 자치 행정을 감시하는 통제 기능, 지역 현안에 대한 조정 기능이 있다.

 이러한 의회 기능과 권한을 주민들에게 부여받았음에도 산청군의회는 주민들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로지 집행부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모습만 보여줬다.

 물론 산청군의 예산은 군민들을 위해 쓰인다.

 하지만 그 예산이 적어도 어디에, 어떻게, 또 재원은 어디서 조달해 쓰이는가는 알아야 한다.

 거의 100억원이 넘는 예산을 군민들이 고루 혜택받지 않은 곳에 선심성으로 쓰는 것은 한 번쯤은 짚어봐야 하는 것이 의원들이 부여받은 가장 큰 의무인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다 못해 한심하기까지 하다. 오롯이 군비만 가지고 진행하는 사업을 전국에서 재정 자립도가 가장 낮은 자치단체 중 하나인 산청군이, 군민 대다수가 공감하지 못하는 곳에 쓰는 작금의 사실이 전해지면 군민은 허탈해하고 분노할 것이다.

 국도비가 전혀 투입되지 않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양해되지 않는 사업의 재원은 군민 세금으로 전부 충당된다.

 지난 코로나 팬데믹의 고통 속에서 힘들게 살아낸 산청군민들은, 이제 본인이 사용하지도 못하고, 또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업들로 인해 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됐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을 산청군의회는 수수방관만 하고 있다.

 4선을 연임한 이도, 3선과 재선도, 의회 본연의 의무와 책임을 회피한 채, 강 건너 불구경이다.

 후세의 산청은 지금의 산청을 망친 작금의 산청군의회를 반드시 원망할 것이다.

 군민은 없고 개인의 이해관계를 통한 영달(榮達)에만 관심이 있는 이들은 이제라도 의원직을 던져야 한다.

 주민들에 대한 봉사는 이제 논하지 마라. 지난 18개월 동안 어떤 마음으로 의원직을 수행했는지는 잘 보여줬다.

 언제까지 부끄러움은 군민 몫이어야 하는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군민들도 분노하고 부끄러워하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피해의식을 떨쳐버리고 뒷담화보다는 자신 있게 권리를 주장하고 찾아야 한다.

 2023년 끝자락에서 다시 보게 되는 산청군의회의 후안무치(厚顔無恥)한 모습들로 다가오는 2024년을 더 분명하게, 더 투명하게, 더 합리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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