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앤의 법률산책] 성범죄 사건에서 증거재판 원칙

  • 입력 2024.03.20 11:07
  • 기자명 /경남연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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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민 법무법인 리앤 대표변호사
이승민 법무법인 리앤 대표변호사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

 범죄사실의 인정은 증거에 의해야 하며, 범죄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

 위 문구는 대한민국 헌법과 형사소송법에 명시된 형사재판의 대원칙이며,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독자분들도 익히 알고 계시는 내용일 것이라 짐작한다.

 그러나, 실재 형사재판에서 무죄추정의 원칙과 증거재판주의가 엄격하게 강조되면, 은밀하게 이뤄져 증거수집이 곤란한 사건에서는 범죄인을 처벌할 수 없게 되는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대법원은 지난 2018년 이른바 성인지감수성 판결이라 불리는 판결을 통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판단에 관한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위 판결은 성범죄 사건에 있어 피해자 진술에 높은 증거가치를 부여한 것으로, 위 판결 이후 다수의 사건에서 CCTV 녹화 영상, 대화 녹음 파일 등 객관적인 증거가 구비돼 있지 않더라도 피해자의 진술을 근거로 추행, 준강간 등 성범죄에 대한 유죄 판결이 이뤄졌다.

 이는 피해자의 보호와 범죄자의 처벌이라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할 수 있으나, 서두에 언급한 무죄추정 및 증거재판의 원칙을 침해한다는 비판도 있어왔다.

 그런데 지난 2024년 1월 대법원에서 “성인지적 관점을 유지해서 보더라도, 성범죄 피해자의 진술의 증명력을 제한 없이 인정해야 한다거나, 무조건 유죄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는 판결이 나와 세간의 관심이 주목되고 있다.

 해당 판결은 자폐성 장애가 있는 남성이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앉은 여성 승객의 왼팔에 자신의 오른팔을 비비고, 여성 승객이 남성을 피해 옆 좌석으로 이동하자 여성 승객의 옆 자리로 이동해 동일하게 팔을 비비는 행동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규정된 ‘공중 밀집 장소에서의 추행죄’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문제된 사건이다.

 위 사건에서 피고인(자폐장애 남성)의 행위가 추행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지 문제됐는데, 피해자(여성)은 추행에 해당한다는 의견을 밝혔으나, 피고인은 위와 같은 행위가 자폐성 장애로 인한 ‘빈자리 채워 앉기에 관한 강박 증상’의 발현이며, 또한 의식하지 못한 채 별다른 의미 없이 팔을 위 아래로 움직이는 ‘상동행동’의 일환이라고 주장했으며, 피해자는 추행의 고의에서 비롯된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평소 피고인의 ‘빈자리 채워 앉기에 관한 강박 증상’과 의미 없이 팔을 위 아래로 움직이는 ‘상동행동’의 사례들을 증거로 제시했다.

 이에 대해 원심 판결은 피고인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자폐성 장애에 따른 상동행동으로서 추행의 고의가 없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면서 유죄로 판단했으나, 대법원은 피고인의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상당하므로 피고인에게 추행의 고의가 있었다고 단정하기 부족하며, 헌법상 무죄추정의 원칙과 형사소송법상 증거재판주의에 근거해서 피고인을 무죄라고 판단했다.

 위 대법원 판결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부정하지 않았으나, 판결 이후 불과 2달 남짓 지난 현재까지 위 판례의 논리에 따라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배척하고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 사례가 20건 이상 선고된 것으로 확인된다.

 구체적으로 과외학생에 대한 강제추행이 문제된 사건에서 피고인의 범행에 대한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은 점과 피해자가 과외를 받기 싫어했던 점을 근거로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배척한 사례가 있으며(허위 또는 과장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피고인의 평소 생활모습과 평판, 피해자가 허위 진술을 할 만한 사정이 있었는지 여부 등을 살펴 추행 등 성범죄를 주장한 피해자 진술을 믿기 어렵다고 판단해 무죄가 선고됐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위 대법원 판례를 환영한다.

 범죄행위자는 그에 맞는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죄없는 사람이 억울한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수년간 강간, 추행 등 성범죄사건에서 가해자로 지목되면 피의자 또는 피고인이 무죄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한 유죄를 피하는 것이 힘들었고, 이 때문에 수많은 성범죄 사건에서  처음부터 무죄주장 자체를 포기하고 합의를 시도하는 상황이 반복돼 왔다.

 그러나 위 대법원 판례의 논리에 따라 향후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의 진위여부를 따져 범죄혐의에 대한 판단이 이뤄질 것이며, 합당한 증거 없이 성범죄자로 낙인찍히는 억울함도 상당부분 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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