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준엽의 미술산책 [25]

엄윤영이 전하는 자연의 메시지

  • 입력 2009.08.24 00:00
  • 기자명 경남연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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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가장 큰 스승이다. 자연은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인류 역사에 족적을 남긴 현명한 사람들은 자연이 보내는 메시지를 읽어낸 이들이다. 특히 예술가들은 자연을 향한 뛰어난 센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센서는 언제나 풍부한 감정으로 충전돼 있어야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엄윤영은 분명히 뛰어난 센서를 가진 작가다. 그는 풍경을 그린다. 뛰어난 경치가 아니고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보통 풍경이다. 그처럼 흔한 경치 속에서 범상치 않은 풍경을 뽑아낸다. 자연이 보내는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이다.

엄윤영의 회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나무다. 멋들어진 풍채를 자랑하는 우람한 나무가 아니고, 뒤틀리고 굴곡이 많은 앙상한 가지의 볼품없는 나무다. 거의 나목에 가까운 애처로운 몰골이다. 사연 많은 사람의 일상사처럼 무수하게 많은 잔가지들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처럼 보잘것없고 이름 없는 나무를 가지고 엄윤영은 예사롭지 않은 정취를 빚어낸다. 그래서 그의 풍경에서는 진한 여운이 배어 나오는 것이다. 마치 저녁 산사에서 울리는 범종 소리처럼.
그런 울림이 진한 엄윤영의 그림을 보자.

‘봄밤’이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꿈결같은 포근함이 담뿍 담긴 멋들어진 밤 풍경이다. 꽃향기 흠뻑 머금은 달빛이 은은하게 퍼지고 있다. 나무의 품새로 보아 벚꽃인 듯싶다. 달빛에 취한 꽃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 밤하늘의 절묘한 색채 벚꽃의 군무 승화
이 그림은 사실적 풍경은 아니다. 벚꽃 핀 어느 봄밤 만월 속 풍경을 가슴에 담았다가 화면에 토해낸 작가의 감정적 풍경이다. 그것도 세련되게 절제된 감정이다. 그런 낌새는 그림을 만들어나가는 솜씨에서 눈치챌 수 있다.

엄윤영의 그림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유화를 다루는 능숙한 맛이다. 공력의 깊이가 우러나오는 대목이다. 유화는 색깔을 겹쳐 칠하면서 화면의 깊이를 나타내는 재료다. 깊이의 느낌을 제대로 내려면 색채의 미묘한 차이에서 오는 맛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능수능란한 붓질의 효과가 더해져야 한다. 오랜 경험과 그것을 소화할 수 있는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즉 재능에 노력을 더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결실이다. 엄윤영의 그림은 이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 그림에서 작가의 이런 솜씨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밤하늘에 은하수처럼 흘러가는 벚꽃의 군무다. 달빛에 녹아 지천에 흐드러진 벚꽃을 보고 주체할 수 없었던 감정을 이렇게 풀어놓은 것이다. 흰색은 채도가 없는 색이기 때문에 이처럼 무더기로 칠하면 화면에서 떠 보이게 된다. 그런데도 이 그림에서는 빛을 뿜어내며 제대로 붙어 있다. 정말로 달빛을 받아 빛나는 벚꽃 군락처럼 보인다. 어떻게 이런 효과가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밤하늘의 절묘한 색채 덕분이다. 청보라빛이 감도는 회색톤의 밤하늘이 흰색의 부산함을 다독이는 것이다. 이것을 거들어주는 것은 화면 앞쪽의 언덕이다. 갈색톤이 감도는 검정에 가까운 회색으로 색깔을 조합해놓았다. 벚꽃의 흰색과 심한 대립을 일으키는 과감한 배치다. 이 때문에 벚꽃은 소란스러울 정도로 밝게 빛나는 것이다. 의도적인 구성이다.

그리고 흰색 덩어리를 벚꽃의 군무로 승화시키는 것은 밤 중천에 떠 있는 만월이다. 이 그림에서 유일하게 기하학적 형태로 그려진 달은 창백하리만치 흰색에 가깝다. 그런데도 따스하게 느껴지는 것은 밤하늘의 색채 때문이다. 실제로 이 그림에서 달은 노란색으로 보인다. 작가는 아주 조금 노란색을 흰색에 섞어 달을 그렸다. 감정의 수위를 세련되게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도 엄윤영의 다른 그림처럼 나무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역시 잔가지가 엄청나게 많은 앙상한 나무다. 배경의 흰색 덩어리의 정체를 확실하게 밝혀주는 벚꽃이 가지마다 눈처럼 달려 있다. 잔가지들이 벚꽃 군락 위에서 자신의 앙상하고도 뒤틀린 모습을 드러내면서 봄밤의 벚꽃 축제를 부추기고 있다.

부드러운 봄날, 달밤에 벚꽃을 본다는 서정적인 설정을 하고 있는 이 그림은 이상하게도 불안정한 구도를 택하고 있다. 화면을 사선으로 자른 언덕도 그렇고, 이를 따라가는 배경의 벚꽃 군락 역시 사선으로 흐르고 있다. 아마도 봄밤의 싱숭생숭한 여성의 심리를 일깨우는 의도적인 표현인 듯싶다. 그런 봄밤에 벚꽃 구경까지 했으니 오죽했으랴.

그러나 작가의 센스는 이것마저 절제하는 미덕을 그림 속에다 담아내는 재치를 보인다. 구성의 기술을 눈치채지 못하게 심은 것이다. 그것은 달을 에워싼 여러 개의 가지와 중심의 벚나무 기둥 줄기에서 수직으로 올라간 가지들 그리고 언덕 아래로 뻗어 나온 가지다.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러한 표현 때문에 불안정하게 보일 수 있는 사선 구도는 기능을 잃고 마는 것이다.

엄윤영은 봄밤 벚꽃의 추억을 이처럼 절제된 시적 정취로 풀어내고 있다. 야트막한 언덕 위로 보이는 벚꽃 나무 군락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봄날에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풍경 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면 엄윤영이 이런 보통 풍경에서 읽어낸 자연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 세상 모든 것은 자신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아름다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아닐까.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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