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동 김용식씨네

김씨의 집에서 내려다 본 악양 들녘 풍경

  • 입력 2006.04.10 00:00
  • 기자명 이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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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되었다. 웰빙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인데, 황토집이라든가, 전통 음식들 … 웰빙이라고 이름 붙인 것의 속내를 들여다 보면 잘 먹고 잘사는 것 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산다면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진정한 웰빙이 무엇인가. 웰빙을 찾아 떠난 사람들을 만나 보겠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는 김상용의 시 제목이다. “밭이 한참갈이 / 괭이로 파고 / 호미론 풀을 매지요 /… 왜 사냐건 웃지요.”



“차맛이 좀 짜죠?”
김용식(58)씨가 차를 건네고 한 말이다. 김씨는 “맛이 진하다”는 말을 “차맛이 짜다”고 표현했다. 그러고 보니 차맛이 진하면서 독특한 향기를 냈다. 그가 직접 만들어 파는 차다.



그에게도 명함이 있는데, 그는 선우다농의 대표이다. 이 동네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그의 제다원도 소규모의 가내 수공업이다.
올해 녹차는 많이 했냐고 묻자, “소질이 없어서 많이 못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녹차 물량이 모자라서 녹차를 다른 집에서 사 가지고 하기도 했다”는 말을 했다. 지난 해 녹차장사를 매우 잘했던 모양이다.

김씨의 차맛을 보고 처음에는 녹차를 발효시킨 것이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김씨는 발효차가 아니라 덖음차라며, 개인적으로는 “발효차를 좋아한다”고 설명했다.
“다도라든지 다예 같은 것은 잘 몰라요. 그저 차가 좋아서 차를 숭늉 마시듯 상용합니다. 찻물의 온도에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김씨가 다도나 다예를 실제로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차에 대해 해박하다. 차를 좋아한 까닭에 20여년 전부터 이미 하동의 화개골을 들락거렸다고 한다.
“옛날에는 화개골에 지금처럼 찻집들이 번성하지 않았어요. 조태연가와 몇몇 제다집이 있을 정도인데, 그 때 이미 조씨 등 차의 달인들을 찾아다니며 제다법을 섭렵했죠.”
김씨는 원래 화개골에 터를 잡으려고 했다. 6년 전의 일이다. 6년 전에는 이미 화개골이 너무 번화해 있었다. 그래서 화개골의 대안으로 찾은 곳이 악양이다.

요즘 악양도 차 세울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붐빈다. 지난해에 SBS에서 ‘토지’를 방영한 후 관광객들이 부쩍 늘어나서 악양 곳곳이 시골답지 않은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욱이 예전에 없던 부동산 중개소가 생기는가 하면 투기꾼들이 땅값을 많이 올려놓았다. 김씨는 “악양이 지금처럼 번화했다면 아마 악양에도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전원생활 하는 것이 아니고 농사꾼입니다. 삶의 여유를 가지고 농촌에 조그만 텃밭 가꾸며 사는 것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짓는 사람입니다.”
김씨는 자신의 삶을 전원생활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농사꾼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그는 부산에서 살다가 악양면 매계리로 귀농한 농사꾼이다.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김씨는 부산에 살다가 가족과 함께 미국에 이민을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역이민을 했다.
“미국서부터 귀농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을 떠나 한국에 도착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귀농학교에 들어갔죠.”
김씨가 다닌 귀농학교는 실상사 귀농학교였다. 환경문제를 많이 생각하면서 유기농법을 가르치는 학교인데, 그 당시 20여명이 학교에 다녔다.
귀농학교의 학생들은 대개가 농사에 대해 문외한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그들이 김씨를 보고 “내가 여기에서 가장 ‘무식한’ 농사꾼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김선생이 나 보다 더 모르고 있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는 농사에 대해 깜깜했다.

귀농학교를 졸업하고 악양 중대리로 왔다. 6년 전의 일이다. 첫 해에 마을에서 송아지를 샀다. 암송아지인데 불구하고 성질이 매우 거칠었다. 원래 주인도 이런 이유 때문에 송아지를 김씨에게 판 것이다. 송아지를 키우면서 송아지로부터 발길질을 한 두 번 당한 것이 아니다. 결국 어미소가 되면서 소가 순해졌고 정이 들어 식구처럼 느껴졌다. “그 집 아이가 부모를 닮듯, 집짐승도 주인을 닮더라”며 김씨는 은근히 사람 좋은 티를 냈다.
김씨는 이 곳 노전마을로 이사 오면서 소를 팔 수밖에 없었다. 노전마을에 집을 지으면서 돈을 빌려야 될 판인데, 시골에서 돈 될만한 것이 소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대로 된 농사꾼 같으면 두 배째 송아지 를 내고 나서 팔아야 하는데, 송아지 한 배 내고 팔아버렸다고 했다. 그래도 송아지 카우는 재미가 가장 솔솔했다고 한다.

“새끼 놓을 때 참 신비롭데요. 집 사람 하고 나하고 송아지를 받아 냈는데, 책을 봐 가며 산모와 함께 출산의 고통과 신비로움을 함께 체험했죠.”
소가 너무 좋아서 그 당시 시세에다 백만원을 더 얹어 받았다고 한다. 소 판돈하고 융자로 빌려 돈을 마련하고서 새 집을 지을 수 있었다. 소를 팔 때는 눈물이 나더라는 말을 했다.
김씨의 집 뒤에는 형제봉이 바라다 보인다. 앞은 칠성봉이다. 형제봉을 업고 칠성봉을 안대(안대)로 삼아 집을 지었다. 마을의 훨씬 뒤쪽이라. 전망이 좋다.

귀농인에게 가장 궁금한 것이 “시골에서 먹고살만한가”하는 물음이다. 김씨의 대답은 “먹고 살기 힘들다”고 대답했다.
“전문적인 농사는 아니지만, 이것저것 조금 조금씩 하지만, 생활은 안되죠. 6년동안 많이 까 먹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얘들이 셋입니다. 농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돈은 전혀 못 벌었습니다. 오히려 큰돈은 아니지만 돈이 조금씩 조금씩 들어갔죠.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어렵죠. 고등학생이 둘인데 대학 보낼 일이 걱정입니다.”
김씨는 부인 외에 하동여고에 다니는 딸 둘과 악양중학교에 다니는 아들 하나가 있다.이현도기자 lhd@jog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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