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예스터 데이①

  • 입력 2006.07.04 00:00
  • 기자명 권경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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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그때까지 주르륵 주르륵 소리 없이 내리고 있고, 바라라크의 “비에 젖어도”는 이미 끝나고 뒤이어 “웨딩 벨 블루스”의 흠뻑 젖은 음률이 거실 안을 담배 연기처럼 스멀스멀 기어 다니고 있다.

박준호의 첫 경험의 밤은 그렇게 깊어간다.
이튿날 박준호는 마거릿에게 전화를 걸지 않는다. 아니, 걸지 않았다고 하는 말은 어폐가 있다. 솔직히 걸지 못했다고 해야 옳다.

우선 그는 거의 열두 시 가까워서야 자리에서 일어났고, 일어난 뒤에도 경황이 없다. 그것도 혼자 “휴, 잘 잤다” 기지개를 켜고 기상한 것이 아니라 시끄러운 노크 소리 때문에 번쩍 눈을 뜬 것이다.
다름 아닌 다이애너다.

“오빠, 열두 시야, 열두 시!”
“아니, 너 웬일이야!”
“포츠머스에서 도망쳤어.”
“도망치다니?”
“우리 친엄마 잔소리 듣기 싫어서…… 그냥 나와 버린 거야. ……실은 오빠도 보고 싶구.”
“그래, 고맙다.”
“근데, 이렇게 늦게 일어나는 법이 어딨어?”
“방학이잖니.”

박준호가 말한다.
“오늘이 방학 첫날이야.”
“하긴…… 오빠, 나 하나 물어 봐도 돼?”
“물어 봐.”
“오빠 잠 잘 때 늘 이렇게 벗구 자?”

다이애너가 알몸인 채 시트를 휘감고 있는 박준호를 경이롭다는 듯이 바라본다.
“넌 입구자니?”
“나두 벗구 자고 싶은데 친엄마 땜에 안 돼. …… 정말 지겨워 죽겠어.”
“미안하지만, 자리 좀 비켜 줄래?”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다이애너가 집에 도착했을 때 톰 라더 부인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새벽녘 화장실에 다녀 온 뒤, 박준호가 제 발로 2층 방으로 옮겼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그때 깨어 있었으면 “어딜 가? 어서 와!” 하며 또 두 팔을 벌리고 채근했겠지만, 하늘의 도움으로 그녀는 깊이 잠들어 있었고, 박준호 역시 오랜 습관 탓에 2층 계단을 올라가 제 침대에 거꾸러졌던 터다.

집 안에 다이애너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극과 극을 달린다. 무엇보다 다이애너 태도가 그러하다. 뭔가 좀 이상하다. 아무 예고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것도 그렇지만, 박준호와 톰 라더 부인의 미세한 표정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번쩍번쩍 돌아가는 눈빛이 매섭다.

“분명히 뭔가 있어. 내가 캐내고 말겠어.” 식이다. 하나 그러면 그럴수록 톰 라더 부인의 몸은 더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 같다. 입을 꼭 닫고 있다.

처음 법적인 두 모녀를 집에서 만난 날 오후 상황 그대로다. 그때는 그녀가 감자를 깎고 있었지만, 오늘은 세탁기에서 꺼낸 옷들을 정원 빨랫줄에 널고 있다.

눈부신 흰 빨래와, 구름 한 점 없는 햇빛과, 산들산들 부는 바람과, 금발머리를 뒤로 묶어 올린 목덜미의 우윳빛깔이 그처럼 싱그러울 수가 없다. 원색의 여름이 온통 그곳에 다 응축돼 있는 느낌이다.

박준호는 형언할 수 없는 충동을 조용히 삼켜 넣는다. 다이애너만 없다면 그대로 달려가 그녀를 잔디밭에 눕히고도 남았으리라, 스스로 자백해 마지않는다.

그런 충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톰 라더 부인은 묵묵히 일만 한다. 언제 그처럼 격렬한 정사를 벌였느냐는 식이다. 다이애너가 옆에 있는 한 눈길 한 번 박준호에게 주지 않는다. 오히려 박준호가 그녀를 스치면서 엉덩이나 가슴을 살짝 터치할 정도다.

그래도 그녀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물론 그녀도 자제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박준호는 배가 몹시 고팠으므로 아침 겸 점심을 허겁지겁 먹었는데, 다이애너와 톰 라더 부인이 똑같이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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