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경이보다 강인한 삶이 이곳에 있다

울산포구기행-'주전 보밑포구'

  • 입력 2010.12.28 00:00
  • 기자명 경남연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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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 동구 주전동 끝 지점에 해당되는 보밑포구에 들어서면 해풍에 질경이 향이 실려 오는 듯하다. 질경이처럼 강한 생명력으로 난관을 뚫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풍랑이 심해 며칠째 포구에는 배들이 묶여 있다. 작은 연못처럼 작은 포구에는 6척이 운항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단 3척의 배가 있을 뿐이다.

이 마을의 터줏대감인 A횟집을 포함해 세 곳의 횟집에서만 배를 운항하고 있다. 대부분 횟집은 민박·펜션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동글동글한 몽돌로 유명한 지역이라 한때 수석가게가 성업을 했지만, 지금은 이 또한 민박집으로 전환했다.

20여년 전만해도 이곳에 마을이 형성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다. 당시 봉수대로 유명한 봉대산 아래라 해서 ‘보밑’이라는 지명을 얻게 된 마을은 사실상 마을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외딴집 한 채만 덩그러니 있었을 뿐이다.

이 마을 최고령이자 국가유공자인 A횟집 김모(81)씨는 이곳에서 6대를 이어 살고 있다.
6·25 동란 때 공을 세워 유공자가 된 김씨는 숱한 난관을 거치면서도 질경이보다 강인하게 살아왔다. 비록 연로해 자식에게 어선 키를 넘겨주었지만, 일에 이력이 날 만큼 많은 일을 했다. 예전보다 나은 생활을 하면서 옛 시절을 회상하게 될 줄을 어떻게 알았을까 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김씨는 한때 봉대산 골마다 집을 지어 사람들이 살았지만, 나라의 정책에 의해 모두 철거됐다며 자신은 바닷가에 집을 짓고 살았기에 철거되지 않고 지금까지 생활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그는 “지금은 마을 진입도로가 생기고 방파제가 조성돼 풍랑의 피해가 적지만, 예전에는 집안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은 예사였다”며 “애써 일군 고구마 밭이 파도에 씻겨 자취도 없이 사라질 때가 많았다. 오죽했으면 바닷가에 사는 것이 무서워 다 떠났겠냐”고 반문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고 말하는 김씨의 말처럼 파도가 유난히 거세지만, 예전과 다른 환경이다.

일대에는 가족휴양지로 지정된 곳이 세 곳이나 된다. 바다 경치가 아름다워 주말이면 가족 단위로 즐겨 찾는 곳이 됐다.

“남풍에 부푼 돛배에 해가 떠올라 / 하늘과 바다 사이에 갈대처럼 떠가네 / 마음 바다보다 더 넓고저 하는데 / 앞길에는 가득히 구름이 밀려오네.” (홍세태 시 ‘주포에서 배 띄우고’ 중에서 일부)

봉대산 산행이 시작되는 지점에 60대 후반의 나이로 1719년 7월부터 1721년 말까지 울산 감목관으로 재임했던 홍세태의 시비(주포에서 배 띄우고)가 눈길을 모은다. 그의 또 다른 시에도 물고기를 잡아 어렵게 살아가던 어민들의 심정이 담겨 있어 관심이 쏠린다.

시비 우측 주전천 가장자리에 방어진 출신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 고 천재동(2007년 작고)씨의 작품이 눈길을 끈다. 아이러니하게도 천 작가가 기증한 작품 ‘오줌싸개’ 동상이 바닷가 사람들의 모진 삶과 달리 평온함을 준다. 그래서일까 자주 이곳을 찾고 싶은 마음이다. 특히 작은 마을이지만 비경이 곳곳에 숨어 있다.

보밑선착장에서 차량통행이 끝나지만 현 남목미포조선(예전 미포항) 쪽으로 걸으면 뜻밖의 아름다운 경관에 놀라게 된다.
하얀 몽돌밭 앞에 펼쳐지는 기암괴석에 매료되고 월남참전용사들이 지은 ‘월남정’ 너머로 보는 동해바다도 일품이다.

조성이 잘 된 주전 제2주민휴양지에도 주말이면 방문객들로 붐빈다. 거센 파도와 강풍에도 질기게 피어나는 갯완두꽃이 애처롭고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 위 하얀 찔레꽃이 피어 파도가 삼킨 이야기를 토해내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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