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의 시크릿가든(111) /후암미래연구소 대표

기 모이는 강화도…이래서 한반도의 배꼽

  • 입력 2011.11.04 00:00
  • 기자명 경남연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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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찬연하다. “오늘 같은 날씨라면 개성의 송악산도 볼 수 있다”는 어느 등산객의 말에 귀가 솔깃하다. 강화도 고려산. 해발 436m로 강화 6대산의 하나이며 마니산과 함께 단연 강화의 명산으로 손꼽힌다. 고려산은 봄이면 분홍빛으로 물드는 약 20여만평의 진달래 군락지가, 가을이면 능선을 따라 은빛 억새가 관광객의 발길을 잡는 절경을 자랑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워낙 군사보호시설이 많아 민간인의 출입이 쉽지 않았고 접근도로 또한 용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을정취가 한껏 묻어나는 마니산은 해발 467m로, 기암괴석이 정상을 향해 치솟아 있는 모양이 하늘을 향한 관문 같은 느낌을 주며, 서쪽 기슭에는 조선시대 승려 기화(己和)가 자신의 당호(堂號)를 따서 함허동천(涵虛洞天)이라 이름을 붙인 절경이 펼쳐지고 있다. 동천이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하늘에 닿을 수 있는 길’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참성단까진 이름도 천사(千四), 개수도 1004개인 ‘1004 계단’을 딛고 올라서야 한다. 참성단은 거친 돌을 다듬어 쌓은 제단으로 기단은 지름 4.5m의 원형이고, 상단은 사방 2m인 정방형이다. 이는 상고시대부터 가지고 있었던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참성단의 축조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고려 말의 대학자 이색(李穡)이 ‘참성단시’에 “이 단이 하늘이 만든 것은 아닌데 누가 쌓았는지 알 수 없어라”라고 한 것을 보면, 고려 이전부터 있었다고 보여진다.

1년에 두 번 개방되는 민족의 성지 참성단을 중심으로 강력한 양기(陽氣)가 파형을 이루며 섬 전체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기운이 내 몸을 통과하는 순간 발끝부터 또 다른 기운이 치고 올라왔다. 섬뜩한 상극(相剋)의 기운이었다. 강화 주변의 바다는 세계적으로 조수간만의 차이가 가장 큰 곳으로 동양철학의 견지로 보면 달의 영향으로 음(陰)의 기운이 충만한 지역이다. 즉 강화 앞바다의 음기와 마니산의 양기가 충돌해 상극의 기운을 생성하고 있다. 상극의 기운은 만물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기운과 시기가 잘 맞아 떨어지면 크게 생(生)하지만, 반대로 역풍을 만나면 처참히 멸(滅)하는, 극생극멸(極生極滅), 말 그대로 모 아니면 도다.
강화엔 극멸(極滅)의 역사도 존재한다. 고려시대부터 천혜의 요새라는 이점을 안고 왕의 몽진(蒙塵)장소로 명성을 떨쳤던 강화는 조선말 서양의 문호개방압력으로 인해 격전지가 되었다. 특히 고종 8년 신미양요는 강화의 비극이었다. 문호개방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침략한 미국과의 전쟁 결과, 미국 측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에 불과하였던 것에 반해 조선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여명이라는 학살 수준의 완패를 당한 것이다. 그 후 강화도는 대표적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 등으로 조선왕조의 역사와 함께 명멸(明滅)하는데.

강화 특유의 상극(相剋)의 기운 탓인지 고려산에서 태어난 연개소문은 당(唐)을 대파한 천하맹장으로 고구려 최고의 권력자가 되지만 권력을 자기 가문에 집중시키는 바람에 그가 죽은 뒤 고구려도 멸망일로를 걷게 된다. 고려의 최씨 무인정권 역시 나라의 흥망성쇠와 함께 했다. 아버지 최충헌(崔忠獻)의 권력을 물려받은 최우는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자 수도를 강화로 옮겨 항몽(抗蒙)을 펼치며 아들 최항(崔沆), 손자 최의까지 권력이 이어진다. 하지만 최의가 살해되자 무인정권 60년도 막을 내리고 이듬해 원(元)과 화친함으로써 고려는 굴욕적인 원의 섭정기로 접어들고 만다. 46년 재위 기간 동안 최씨 정권의 꼭두각시였던 고려 고종은 아이러니하게도 원과 화친을 시도하자마자 생을 마감한다.
최근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 연구소가 750년 전 충남 태안 마도 앞바다에 침몰된 화물선에서 수많은 물품들을 인양했다. 그중에는 전복과 홍합 젓갈 등을 담은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 웅크려 있었어도 각 지방의 물품들이 강화도로 들어올 정도로 국가의 기능은 작동되고 있었다는 증거다.

강화 천도가 이루어졌을 당시 최우는 계속되는 전란의 와중에서도 개경으로부터 온갖 물자를 들여오고 수천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궁궐을 지었다. 강화 고려궁의 뒷산인 북산을 개경처럼 송악산으로 이름을 바꾸고 궁궐의 배치도 개경과 똑같이 했다. 그렇게 하여 또 하나의 개경이 되어버린 강화도를 사람들은 강도(江都)라 하였다. 자신의 사저를 궁궐만큼 호화스럽게 꾸며놓은 최우는 강도에서 최고의 권력을 구가했다. 때때로 삼별초를 내륙으로 보내 몽골군의 정세를 염탐하거나 기습공격을 감행하기도 하는 등 대몽 항쟁도 계속했다.
그러나 지금 남아있는 고려 궁지는 초라했다. 몽골과의 화친이 성립된 뒤 몽골은 ‘삼별초의 잔당을 소탕한다’는 구실로 고려 궁궐을 태워버렸으며 남아있던 몇 개의 건물마저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고 이 자리에 세워졌던 조선의 이궁마저 병인양요 때 전소됐다. 현재 몇 채의 건물이 복원되었기는 하나 옛 강도의 모습을 엿보기에는 역부족이다.

과연 백성을 내버려둔 채 조정만 강화도로 피란한 것은 진정 나라를 위한 천도였을까, 아니면 최씨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술책이었을까. 강화도가 천혜의 요새인 것만은 확실하다. 일단 육지로부터의 물길은 짧으나 간조(干潮) 차이가 크고, 해안가가 대부분 절벽이라 배를 대고 내릴 곳이 없다. 해안선 굴곡이 심해서 물살이 세므로 배를 타고 건너는 것도 쉽지 않다. 게다가 겨울이면 한강, 임진강, 예성강 하류에서 흘러 들어온 얼음조각과, 썰물 때 언 바닷물이 밀물 때 밀려들어 유빙(流氷)으로 가득한 바다에서는 배가 꼼짝할 수 없게 된다. 해전에 약한 몽골이었기에 강화도는 더더욱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였다.

강화도는 한반도의 기운이 한곳으로 모여드는 중심이며 우리 민족의 뿌리를 태동케 한 시원지다. 모든 사람에게는 위기에 처했을 때 고향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몽골의 침략으로 국토가 만신창이로 짓밟혔을 때 사람들이 강화도를 떠올린 것도 그러한 본능의 발현이었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화려했을 고려궁궐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휑한 궁터만 남아 권력의 무상함을 전하고 있다. 고려궁지를 걷고 있노라니 바람결에 최우 영가와 고종 영가의 목소리가 교차했다. 최우 영가는 “내가 고려다. 내가 살아있는 한 고려는 건재하다”고 믿고 있었으며, 고종 영가는 “강화도는 감옥이었다. 나는 강화에서 단 한순간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서해바다 위로 해가 지며, 찬란했던 태양이 마지막 빛을 화려하게 뿜어내고 있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낙조의 순간이 꼭 강화도를 닮아있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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