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성, 가슴이 뛰는 방향으로 ‘청춘로드’ (15)

3360시간 동안의 멕시코 자전거 여행

  • 입력 2011.11.08 00:00
  • 기자명 경남연합일보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피곤 때문에 늦게 일어나니 숙소가 암자처럼 조용하다. 다들 패키지여행으로 트레킹 하러 산으로, 노곤한 피로를 풀려고 온천으로 가는 마당에 나 또한 하루를 허투루 보낼 수 없어 입에 넣는 둥 마는 둥 간단한 아침식사를 한 뒤 쿠퍼 캐니언으로 향하는 도로로 나왔다.

아침에 열차를 놓쳤기에 비탈길을 따라 차량으로 이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차량을 렌트하기엔 비싼 요금이다. 자, 그렇다면 다시 젊음을 만끽할 시간이다. 히치하이킹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외진 산골에서 멀리 이동하는 차량을 섭외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이리 방방, 저리 붕붕, 줄기차게 손을 흔들길 한 시간여. 마침내 쿠퍼 캐니언에 산다는 현지인의 소형 트럭 탑승에 성공했다. 다만 좌석이 없었으므로 짐칸에 오르기로 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이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굵은 소나기가 내리붓기 시작하면서 온도가 급강하했다. 멀리 보이는 계곡에선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숙소에 틀어박혀 있지 않고 히치하이킹까지 마다한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까 비와 추위로 피폐해진 몰골은 변죽 울리는 하늘을 두고 원망했다.
쿠퍼 캐니언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다는 디비사데로(Divisadero)역에 도착할 때 다행히 비가 그쳤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작은 도움에 감사하며 아이에게 바나나를 건넸다. 차에서 내려 터덜터덜 전망대를 향해 걷던 나는 여기까지 오는 내내 세찬 비가 내린 까닭에 풍경 감상은 체념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일단 먹고 보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랬다. 이따가 절경을 감상할 때 온 정신의 집중을 다하기 위해 일단 배부터 채울 필요가 있었다. 전망대 뒤쪽에 위치한 철로 바로 옆에는 여러 노점들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끈따끈한 먹거리들을 팔고 있었다.
어쩜 꽃달임을 쏙 빼닮았다. 음식 앞에서 서성거리기만 해도 냄새가 눈으로 잡히고, 맛이 가슴으로 스며들어온다. 무엇을 먹든 나는 이미 황홀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5페소야.”
관광지임을 고려해도 결코 싼 가격이 아니다. 한 입 거리에 무려 15페소(약1.2달러)라니. 과연 같은 가격의 귤 3kg만한 가치가 함의되어 있는지 내가 생경스런 이 음식에 감응하여 맛의 르네상스가 펼쳐질는지 잠시 의심했다. 심각하게 고민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이 문장 하나로 결론은 미리 정해져 있다.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여기 와서 이걸 먹어?’
우선 멕시코식 고추치즈튀김인 칠레 레예노Chile relleno를 골랐다. 생전 처음으로 마주한 음식이라 조심스레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한 입 베어 물었다. 고추 안에 잘 볶은 고기와 야채에 치즈를 듬뿍 넣은 맛. 아, 입 안에 천국이 펼쳐진다. 칠레 레예노라. 그 맛에 감읍하여 감정까지 밀어 넣지 않으면 도저히 삼킬 수조차 없었다.

나는 지금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입 안에서 펼쳐지는 맛의 오케스트라에 압도되어 있는 중이다. 신선한 야채가 자극적이지 않고, 보드라운 치즈가 혀끝에서 살살 녹으며 바삭바삭한 튀김옷의 느낌이 미각세포를 흔들어 깨우는 순간 내 정체성이 식신으로 바뀌어 있었다.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땐 난 이미 맛의 환상을 경험한 채 무언가에 홀려 있는 상태였다.
“아주머니, 두 개 더 주세요.”
한국 음식이 그리울 때 매콤한 고추치즈튀김. 으아, 마파람에 게눈감추듯 하나 먹고, 맛을 보고는 너무 맛있어 당연히 하나 더 먹고, 비싸서 여기까지만 해 놓고선 또 하나 더 먹고, 배가 찼다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에 마지막으로 하나 더 먹고 말았다. 주머니 사정만 아니었다면 자리를 전세 내고 싶을 정도다.

불운하게도 비는 계속 내렸고 쿠퍼 캐니언의 웅장함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한 점 지나지 않는 먹거리지만 함께 먹으면 만찬이 되고 무리지어 수다를 떨면 파티가 되는 것을. 기찻길 옆 노점에는 짧은 시간 동안 냄새에 이끌려 맛에 중독된 각국의 여행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조용히 어둠이 깔리고 멀리서 기적 소리를 내던 기차가 안개를 헤치며 기찻길에 빨려온다. 기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승객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러고는 당연한 듯이 노점으로 가 한 봉지씩 음식을 산다. 짧은 시간을 이용해 쿠퍼 캐니언 경치를 구경하는 일부 여행자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마지막에는 급히 먹거리 사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나 역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에 또 두 세트를 더 주문했다.

기차가 출발하고 아득히 멀어지는 노점상의 먹거리들이 작은 점이 되어 갈 때 나는 벌써부터 주체하지 못할 만큼 그리움이 사무치기 시작했다. 너무 아름다운 장면도 혼자 보면 슬프지만 너무 맛있는 것도 혼자만 먹으려면 목이 멘다. 멕시코 들어와 빵만으로 버텼던 지난 배고픈 날을 생각하니 더욱 목이 멘다.
“아, 돌아보면 눈물겨워라. 마음을 비우기 전에 내장이 먼저 비어 있었던 내 젊은 날.”
이외수 옹의 절규에 같은 동지로서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내 손에 들린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먹거리를 들고 식당 칸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나처럼 디비사데로 역 노점 음식에 환장한 동지들이 있었다. 식당 칸에 들어서니 우아한 매너 대신 왁자지껄한 생동감에 입맛이 더욱 살아난다. 혼자 먹지만 결코 외롭지 않은 맛이었다.

뉴시스
저작권자 © 경남연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