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만세는 대대만손 이어져야

1일부터 함안군 내 3·1독립만세운동 기념행사 잇따라 열려

  • 입력 2012.02.28 00:00
  • 기자명 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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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제일의 의거로 평가받고 있는 함안군의 3.1독립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한 행사가 오는 3월 1일 10시 가야읍 충의공원에서 제93주년 기념식을 개최하는 것을 필두로 9일 칠북면, 20일 군북면에서 잇따라 열려 선열의 고귀한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충의공원에서 개최되는 제93주년 기념식에는 항일독립유공자와 유가족 및 하성식 군수와 조진래 국회의원 등 400여명이 참여해 헌화와 분향 및 독립선언서 낭독 등의 행사를 가질 계획이다.

경남 최초의 의거인 3월 9일 칠북면 연개장터 의거를 기념하는 행사는 9일 오전 11시 당시 연개장터였던 칠북초등학교 이령분교의 기념탑 앞에서 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례와 독립선언문낭독, 만세삼창과 체육행사 등을 가질 예정이다.
연개장터 의거는 서울3·1독립시위를 참관하고 돌아 온 14명의 유지를 중심으로 3월 6일 새말예배당에서 29명이 모여 3월 9일 의거키로 하고 대책위원 5명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케 했다. 3월 9일 정오, 연개장터에 모인 천여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으며 태극기를 들고 각 마을을 순회한 후 해산했다.
또 3월 20일 재현되는 군북면 의거는 오전 9시 30분 군북중학교에서 3·1독립운동기념탑까지 시가행진을 하면서 만세삼창과 군북경찰관 주재소 포위, 일본군경의 총포 발사, 21명의 현장 순절과 18명 부상, 일본군경 13명 사상 등의 치열했던 현장을 재현한 후 기념식을 가지면서 선열의 구국의 얼을 되새길 예정이다.

군북 의거는 군북 시냇가에 5000여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진 후 군북경찰관주재소를 포위했다. 위협을 느낀 군인과 경찰이 발포하여 애국지사 21명이 현장에서 순절하고 구경하던 남녀 각 한명이 유탄에 목숨을 잃었으며 18명의 지사가 크게 부상당했다. 특히 군북의거는 일본군대가 포사격으로 이를 진압할 만큼 격렬하게 일어났다.
조선군 헌병사령부에서 작성한 사상자표에 의하면 애국지사의 사상자 수는 평남 맹산(사망 54명, 부상 13명), 경기 제암(사망 29명), 평북 정주(사망 28명, 부상99명), 평남 선천(사망 25명, 부상 13명)에 이어 함안군 군북면으로 전국에서 희생자가 다섯 번째이며 삼남(三南- 충청, 전라, 경상)에서 제일로 많았고, 또 일본군경의 사상자 수도 13명으로 전국에서 제일 많아 당시의 치열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함안군의 3·1독립만세운동은 3월 9일 경남 최초인 칠북면 연개장터 의거를 필두로 3월 12일과 17일 평림장터 의거, 18일 이룡리 의거, 19일 함안읍 의거, 20일 군북면 의거, 28일과 4월 3일 칠원면 의거 등 총 8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경남 최초, 일본 군경 피해 최대, 독립운동사실증명서 요구, 군수의 독립만세운동 등 숱한 기록도 갖고 있다.

3·1독립만세운동은 당초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시작돼 함안에서도 공약삼장에 따라 3월 9일 연개장터 의거부터 18일 이룡리 의거까지는 평화시위에 그쳤지만 3월 19일부터는 폭력적인 시위의 양상을 띠면서 수차례 포병대대가 출동하고 진압과정에서 많은 애국지사가 탄압을 받았다.
이는 함안읍의거의 주체가 대종교에 바탕을 둔 동명학교로서 폭력 시위로 계획된 데다 안지호 의사가 투옥되자 이를 구출하기 위해 경찰 주재소를 파괴하면서 성격이 바뀐 것으로 이튿날 일본군경의 피해가 가장 많은 군북 의거의 진압과정에서 포병대대가 처음 출동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난 애국지사들은 3월 28일과 4월 3일 두 차례에 걸쳐 칠원면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면서 다시 포병대대의 출동으로 진압되는 등 전국 어느 곳보다 오랜 기간 격렬하게 진행됐고 이에 따라 수많은 애국지사가 고초를 겪었다.
3·1독립만세운동으로 함안에서 형을 언도받거나 기록에 나타나는 애국지사는 150명으로 마산 42명, 창원 41명, 통영 23명, 창녕 23명의 몇 배에 달한다. 또 형량의 누계는 함안 136년, 창원 33년, 통영 19년, 마산 18년, 창녕 13년 등으로 함안의 3·1독립만세운동의 여파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 기록은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의 재판판결문이나 수형기록이 철저히 파훼되어 찾지 못하고 6·25전쟁으로 함안면, 군북면, 법수면, 대산면사무소가 불타면서 수형자명부까지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그나마 여항면에서 발견된 함안읍 의거의 신문조서 등의 일부 문헌을 통해 밝혀진 것으로 전체 기록이 온전히 남았다면 훨씬 더 많은 애국지사가 밝혀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에도 함안에는 왜경살해사건, 군북보통학교사건, 군북농민조합사건, 법수면 학교이전반대 항일운동, 동창야학교사건, 일제강점기 내내 항일운동이 지속되고 이에 따른 구속과 연행이 끊이지 않으니 ‘마산형무소는 함안사람의 재실’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는데 그만큼 함안의 독립운동이 치열했음을 나타내는 증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3·1독립만세운동을 규명한 초기 책자가 정확한 규명 없이 도내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칠북면 연개장터 의거를 누락하고 군북면 의거도 조씨일문 참화사건으로 기록하는 등 오류가 많아 이는 빨리 개선해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1960년대 독립운동편찬위원회가 발행한 ‘독립운동대사전’에는 군북면 의거를 조씨일문 참화사건이라며 ‘함안군 녹동면 조성근이 독립단 주모자로 3·1운동때 학살되자 시위가 일어나 21명이 순국하고 일제 무리 13명을 부상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녹동면과 조성근은 근거가 없는 등 명백한 오류가 확인되고 있다.

1979년 9월 10일 삼일동지회가 발간한 ‘경남 부산 3·1운동사’도 ‘각 도별로 제일 처음 3·1운동이 일어난 일자는 3월 1일에 서울·황해도·평안남북도·함경남도 《중략》 3월 11일 동래 의거를 필두로 경상남도의 만세 운동은 도내로 번져 3월 13일 영산·밀양에서, 3월 14일에는 창녕·통영에서 일어났고 점차로 도내 각 군·면으로 확대되었다’고 기록해 연개장터와 평림장터 의거가 누락돼 있다.
3월 9일 연개장터 의거는 칠원 경찰주재소와 거리가 멀고 비밀이 유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평화롭게 매듭지어져 당일에는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 정보를 입수한 왜경은 조사를 시작했는데 모두가 사실을 부인하고 축소함에 따라 훈방됐다.
조선헌병대사령부의 기록에는 ‘3월 10일께부터 함안군 칠원 기독교 신도들은 장날을 이용해 소요를 일으키려 하였다. 소관 주재소 경찰관은 이를 탐지하고 주모자로 지목되는 자를 엄중히 설유해 무사할 수 있었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2006년 12월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7집’과 2006년 2월 발간한 ‘함안 3·1운동사 연구용역보고서’를 통해 이미 1919년 3월 9일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 연개장터에서 경남 최초의 의거가 일어났음을 밝히고 있다.
또 2001년 국가보훈처 마산지청이 펴낸 ‘경남항일운동 참여록’ 등의 자료와 2005년 부경역사연구소의 ‘지역과 역사 16집’에서 고찰된 ‘함안지역 3·1운동 연구’에서도 이미 칠북 연개장터 의거가 체계적으로 준비되고, 의식적이고 주도적으로 추진됐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등 연개장터 의거가 경남 최초의 의거임이 드러나 있다.
그 외에도 함안군의 3·1독립만세운동은 다른 곳의 의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을 많이 갖고 있다. 전국에서 발생한 폭력시위는 대부분 강압적 진압에 의한 반발로 일어났으나 함안읍과 군북면 의거는 애초부터 폭력시위로 계획되어 진행됐다.

대종교를 신봉하며 단군의 영정을 모시고 참배하던 동명학교 교사들은 3월 19일 함안읍 의거를 주도하며 무저항, 비폭력, 평화적 시위로는 광복을 기약할 수 없으니 천신에게 고천제(告天祭)를 지내고, 대한독립의 정당성을 확고하게 주장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시위 도중 안지호 지사가 경찰주재소에 투옥되자 6차례에 걸쳐 주재소를 파괴하고 지사를 구출했으며 함안군청 정문을 파괴하고 일제의 앞잡이인 함안군수를 군중 앞에 세워 강제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하는 한편 함안우체국과 법원 함안출장소, 함안보통학교, 심상소학교도 파괴했다.
또 수차례 많은 지사가 경찰서장에게 3000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는 독립운동 사실증명서 발급을 요구했다. 당시 진행되고 있던 파리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해서였는데 전국 1542회의 3·1독립만세운동 가운데 군수에게 만세를 부르게 하고 사실증명을 요구한 의거는 함안읍 의거 뿐이다.

함안군의 의거는 함안민란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1894년 일어난 함안민란은 당초 향회의 이향(吏鄕) 추천권, 세금 운영권, 공납의 수납권 등을 두고 일어났으나 수령의 수탈과 일본인 상인의 침투에 따른 상업구조의 모순에 따른 농민항쟁으로 이해되는데 결국 좌절되고 만다.

그러나 이런 모순구조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은 계속돼 1899년 대산 도흥진나루에서 군대를 칼로 찌르고 공금 3만여 냥을 강탈했으며 1905년에는 동현과 내아에 침입해 물자를 파괴하고 무기를 탈취했는데 이런 기반이 3·1독립만세운동 때 폭력시위가 일어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하지만 함안군 내 ‘의거 기념행사’는 해결해야할 문제점을 안고 있다.
군북면과 연개장터 의거가 면 단위 행사를 가질 뿐 군 단위의 재현행사가 마련되지 않아 경남 최초의 연개장터 의거나 전국 제일의 함안군 의거가 제대로 일반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앞으로 군 단위 행사의 필요성이 요구되는 점이다.

특히 함안 3·1독립운동을 아우내장터 의거와 비교해 볼 때 유관순 지사와 안지호 지사의 훈격이 같고 시말이 비슷한 점이 많지만 군중의 동원수, 시위의 횟수, 희생자 수, 옥고를 치른 지사의 수에서 함안군 의거가 월등하므로 이를 제대로 알려나가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일념으로 과감히 항일의 길에 자신을 던질 수 있었던 선열의 고귀한 희생정신이 잊혀가고 있는 요즘 독도를 다케시마로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도 3·1독립만세운동의 정신을 되살리고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조

성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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