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희의 뮤직월드]클레오파트라와 이집트 음악

  • 입력 2012.03.27 00:00
  • 기자명 경남연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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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을 초월하는 피라미드 속 문명을 만나는 이집트 여행은 “인간이 배울 수 있는 것은 겸손뿐”이라고 했던 어느 고고학자의 말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5000년 전에 이미 태양력과 측량술, 천문학, 상형문자가 고도로 발달했던 피라미드의 주인공 파라오 시대. 이들의 문명은 로마를 통해 유럽으로 전파되었는데, 이 시대를 얘기하자면 클레오파트라(BC 69~30년)를 빼 놓을 수 없다.

오늘날, 그녀의 왕국은 지진으로 인해 물속에 가라 앉아 흔적을 찾을 수가 없고, 인근 지역인 알렉산드리아에는 그 화려한 전설만이 난무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나일강 서쪽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가 클레오파트라의 이웃 동네이자 이집트 최고의 휴양도시이며 유럽으로 가는 통로인 알렉산드리아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 군이 이집트를 침공한 때는 기원전 332년부터 로마 제국이 멸망한 서기 337년 무렵이다. 이집트는 후기로 가면서 파라오들의 권력투쟁으로 혼란기를 맞으면서 국력이 급격히 쇠약해졌다. 이때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침공해 이집트를 탈환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에서 숨을 거두자(AD 323년) 이집트는 마케도니아의 귀족 가문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배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권력 투쟁에 휩싸인 프톨레마이오스 왕가가 안토니우스와 공조하고 옥타비아누스의 대결에서 패하자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여성 파라오였던 클레오파트라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이 지역을 로마가 접수해 기독교 시대가 열렸고, 이 당시 우상숭배를 철저히 배격하던 기독교인들에 의해 이집트의 많은 신전들이 허물어졌다.
지금도 카이로에는 굽트 교회가 남아 있어 초기 기독교의 신행을 이어 가고 있지만 전체 인구에 비하면 극소수일 뿐 대부분이 무슬림이다. 무슬림이라면 테러를 일삼는 무서운 사람들로만 생각했었는데, 막상 이곳에 와서 보니 그런 사람들은 일부 과격 주의자들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코란의 법률대로 타인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을 큰 덕목으로 여기는 온건한 사람들이었다.

이집트에 이슬람이 들어온 때는 대략 AD 640~ 969년쯤이니 한국으로 치면 통일신라시대부터 토착화되기 시작한 불교와 비슷하다. 그렇기에 오늘날 이곳에서 고대 이집트의 풍속을 찾는다는 것은 한국에서 단군 이전부터 있어온 제천의식이나 무속의식을 찾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클레오파트라가 살았던 후기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BC 711~332년)시대에는 외세의 침입으로 지중해 지역과 소아시아의 풍토가 많이 들어왔는데 음악과 악기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지역이건 외래문화가 범람하게 되면 자신들의 옛 전통을 강화하려는 반작용이 일어나기 마련. 당시 이집트에도 민족의식 함양을 위한 보수주의적 움직임이 대두돼 이집트 전통음악이 일시적으로 부활했다. 이때 이집트의 음악적 보수주의가 헤로도토스와 플라톤 같은 고전적 그리스 저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쳐 그리스의 음악관을 형성하는데 기여했으니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 무렵 로마에는 그리스 문화가 대거 유입돼 그리스의 시와 언어가 합쳐진 뮤지케(Musike)가 함께 들어왔다. 이후 유럽은 비잔틴 시대로 접어들어 기독교식으로 해석된 정신이 문화의 저변을 이뤘고, 이러한 문화의 섞임이 이집트에도 그대로 흘러들어왔다. 당시 이집트에는 팔레스티나와 인접 국가들, 특히 메소포타미아와 활발한 음악 교류가 이뤄졌다.

그 중에 팔레스티나의 페니키아인과 히브리인들의 음악이 우세했기에 당시 피라미드의 주악도에도 겹아율로스(겹살마이)와 샬테리움(Psalterium)을 부는 페니키아인이 보인다. 샬테리움(Psalterium)은 7개의 현을 가진 현악기이고, 아울로스(aulos)는 리코더와 같이 생긴 관악기다. 겹으로 된 리드를 끼워 불어 겹아울로스라고 부른다. 이들 악기의 원류는 그리스와 연결되면서 서양 악기의 시발점이기도 하므로 그 원류를 찾아 들어가는 것은 매우 복잡하다. 한편 히브리인들의 음악은 크게 유목시대, 왕조시대, 귀향 후 선지자 시대의 3단계로 나뉘는데, 이들의 음악은 극소수의 악기와 그림뿐이라 구약 성서의 기록과 그 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니 일단은 접어 두고 넘어가자.

로마와 그리스, 그리고 인근 지역과 끊임없는 접전을 펼치면서도 철옹성 같기만 하던 이집트 이슬람 왕국은 19세기에 이르러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장막의 문을 열었다. 이어 이집트의 나세르(Nasser) 왕정은 폐지됐고, 아랍 공화국이 건립되면서 기원전 341년 이래 약 2300년간에 걸친 이민족 지배의 종지부를 찍었다. 파라오와 수많은 천재들이 일궈놓은 피라미드 시대에 비하면 후대의 이러한 혼란과 굴욕의 역사는 밝은 빛에 투영되는 짙은 그림자와도 같다.

두바이도 이집트처럼 베두인이 인구 구성 비율에서 주류를 차지한다. 셰이크 무하마드 왕의 천재적인 아이디어와 어마어마한 스케일을 보면서 마치 5000년 전 파라오가 환생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스키장, 바다 가운데 세운 인공 섬의 환상적인 위용과 7성급 호텔이 호사스럽다. 두바이와 달리 이집트는 1981년에 들어선 무바라크(Mubarak) 군부의 장기 집권으로, 전국 곳곳에 번듯한 건물과 시설은 모두 군인들의 것이고, 정치범들을 가둔 감옥의 장벽은 높기만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라가 망하는 것은 소수의 힘 있고 가진 자들의 탐욕과 비리가 원인이라는 것은 예외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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