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6월 27일 전라북도 익산시에 소재한 미륵사지(彌勒寺址). 왕 중의 왕이었던 백제 30대 무왕(武王) 시절 창건됐다는 대가람의 실체가 세상에 선보여졌다. 1370년 만의 화려한 외출인 셈이다. 또한 문화재청과 전라북도와 익산시가 후원하고 불교계의 원로를 비롯한 수많은 국민들이 운집해 미륵사지 출토 유품을 관람하고 그 증에서 특히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이운(移運:옮겨 모심)하고 친견(親見:참관)하는 야단법석도 당일 성대하게 치러졌다. 무왕은 신비로운 군왕이다. 홀몸인 모친이 용과 교접해 태어났다는 탄생설화를 지녔으며 서동(薯童)으로 불렸던 젊은 시절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가 천하절색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신라로 들어가 길거
필자는 중앙시장 송학동에서만 15년을 살았다. 30대에 군소기업의 영업직원으로 바빴던 시절 유일하게 지친 일상의 업무에서 벗어나 한가하게 보낼 수 있던 시간은 새벽뿐이었고 매일 새벽에 운동 겸 목욕을 가는 곳이 제황산 공원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던 ‘천지탕’이란 공중목욕탕이었는데 지금도 당시의 습관인지 몰라도 새벽기도와 운동에 길들여져 있다. 목욕탕은 하절기엔 5시, 동절기엔 6시에 문을 열었는데 필자는 천지탕의 1번 입장 손님이란 타이틀을 다년간 보유했었다. 필자가 매일 여명에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은 입구에서 목욕료를 받던 노부인이셨는데 언제나 환한 미소를 건네며 반겼고 나 역시 모친처럼 정이 들어 어쩔 때 노친께서 안 계시고 아들이나 며느리가 대신 매표소를 지키고 있을 때면 “혹시
창원지방법원 홈페이지 정례 관리위원회가 지난 6월 25일 개최됐다. 부족한 법정과 시설물을 보완하기 위한 별관을 짓는데 최진갑 전 법원장 때부터 심혈을 기울였고 법관 인사이동과 연이어 신영철 대법관 파동 때문에 법관들과 법원가족들이 가슴앓이를 하다 보니 자연 위원회의 모임도 그동안 횟수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횟수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홈페이지가 도민들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의 변화의지가 있었고 꾸준히 변화가 진행형이라는데 만족스럽다. 2006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열린 창원지방법원도 벌써 나이가 네 살이나 됐고 베일에 가려져 성역처럼 접근조차 어려웠던 법원이 일반 공기관의 홈페이지처럼 친근하게 변신한데는 법원장 이하 법관들, 그리고 법원 간부들의 파격적이고 능동적인 인식의 전환이
진해는 인구수로 보면 작은 도시이나 인재를 거론하자면 전국에서 손꼽는 도시다. 장복산과 천자봉, 진해만의 빼어난 배산임해의 정기가 떨어진 곳이 특히 진해의 웅동·웅천지역이라고 할 정도로 웅동·웅천은 빼어난 고을이다. 진해를 대표할만한 원로라고 말할 분들 가운데는 전 감사원장 김영준씨를 비롯해 배명인 전 법무장관(전 안기부장도 역임)과 배명국 3선 의원을 비롯해 신상철 경남대학교대학원장을 비롯한 비롯한 정·관계는 물론 법조인과 학자 및 애국지사들을 수없이 배출한 곳으로 웅동·웅천에서 경력이나 벼슬자랑하지 말라는 얘기가 회자될 정도로 고르게 많은 인물들을 배출시킨 명품 동네다. 또한 종교가이자 사상가며 시인으로 유명한 김달진 선생이 태어난 향리도 웅동 1동 소사동이며 일제강점기 시절 이동개
안동시 도산(陶山)에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께서 벼슬길에서 물러나거나 만년에 기거하시던 학숙(學塾 일명 서당)인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자리하고 있다. 이 도산면에 지인 한 분이 살고 있어 한 달에 얼마쯤은 여기에서 머물며 텃밭 한 뙤기를 얻어 상추며 열무를 조금 심어놓고 조석으로 물을 주며 키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정물임에도 그것들은 내 발자국소리를 기억하는 것 같다. 아침이슬이나 저녁의 열기를 묻힌 채 그들에게 다가가는 시각이면 녹색의 이파리를 꼿꼿하게 쳐들고 있는 것이 마치 예절을 갖춰 인사 하는 어린아이의 단정함처럼 내 마음 안까지 녹색의 신선한 야채향(野菜香)으로 가득 채워준다. 그들을 뒤로하며 다시 내가 가는 곳은 도산서원이다. 서원 문 앞에서 옛 성현(
파면과 사형은 듣기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으나 한 인격체인 인간의 권리를 타의에 의해 말살당하는 것으로 당사자에는 가족 전체의 삶의 터전을 잃는 파면이 혼자 겪는 사형보다 더 잔인한 형벌일 수도 있다. 물론 공권력을 남용해 저질적인 수법으로 수뢰나 직권남용을 한 공직자들을 엄단하는 신상필벌은 파면보다 무거운 형벌이 존재하기 때문에 재론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파면이 공직자의 바른 입을 봉쇄하기 위한 조처였다면 그건 법외의 형벌로 피 징계권자보다 징계권자들이 먼저 파면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전남 나주세무서 6급직인 세무공무원이 전번 노무현 대통령게이트에 국세청의 수장이었던 전 청장이 책임질 일이라는 기고를 내부통신망에 올렸다가 공직기강을 저해했다는 아리송한(?)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평생직
노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신지 벌써 2주가 지나갔다. 지난 금요일 두 번째 49재를 치렀다는 보도에 세월은 물처럼 흐르는데 가신님은(死者) 말이 없다는 옛 말이 실감난다. 그러나 대통령 사후의 정국을 보니 대통령께서 남기신 유지와는 달리 정국은 더 급속히 얼어붙고 있다. 살아 계실 때 대나무 울타리는커녕 싸릿대 울타리 역할도 해주지 못하던 모 당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자신들 당리당략의 호재로 삼고 일부 진보출신 인사들도 노 전 대통령의 분신인 양 생색을 내는 칼럼과 기고들을 연일 토해내고 특히 불교계는 앞장 서 종교계답지 않은 처신으로 국론분열을 부추기고 있다. 비록 이명박 대통령이 기독교인이고 서울시장 시절에 공인과 종교인을 구분하지 못한 미숙한 행동들이 더러 있었다고 해도
불교에선 인간은 사망한 뒤 49일 동안은 중음신(中陰神)이라 하여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상태로 허공계를 떠돈다고 한다. 이 떠도는 영혼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일곱 번(49일)을 부처님이나 보살, 그리고 명부를 관장하는 열 분의 대왕(十代大王)과 염라사자들에게 공양을 바침으로써 망자의 가는 길을 잘 인도해주도록 부탁하는 게 49재다. 염라대왕은 명부(冥府)의 시왕 중 다섯 번째 왕이며 명부에서 영가를 재판하는 열 명의 대왕은 진광대왕(秦廣王), 초강대왕(初江王), 송제대왕(宋帝王), 오관대왕(五官王), 염라대왕(閻羅王), 변성대왕(變成王), 태산대왕(泰山王), 평등대왕(平等王), 도시대왕(都市王), 전륜대왕(轉輪王)이라고 일컫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고향마을 사찰인 봉화산 정토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는 경남연합일보 5월23일자 보도처럼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면 사람과 귀신도 울고 중생을 가엾게 여기신 부처님도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신 날의 일기예보는 청명이었다. 그런데도 투신하여 절명하신 그 시각, 봉화산 일대는 갑자기 먹구름이 끼고 비가 뿌려졌다고 한다. 하늘과 부처님도 저 청천병력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걸까. 전 대통령의 생가 입구에서 좌회전 해 몇 분 쯤 가면 오른 쪽으로 봉화산 정토원이란 팻말이 나온다. 생전 노 대통령과 교분이 두터웠던 선진규 법사께서 건립한 관음도량으로 하루 종일 관세음보살의 명호가 산골짜기에 메아리치는 곳이다. 사찰 입구의 포대화상이 길손들을 맞이하고 그
박연차 게이트에 온 가족이 연루되었다며 연일 목을 죄는 검찰과 일부 미디어매체의 검증되지 않은 시나리오와 극우보수 언론의 융단폭격이나 다름없는 폭로전을 견디다 못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하 마을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박연차라는 추악한(?) 기업인에 의해 전직 국가원수가 목숨을 잃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필자는 노 전 대통령의 지지자는 아니었으나 서거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 봉하 마을로 향했다. 봉하 마을의 분위기는 살벌하다 못해 여기저기 주민들의 통곡소리가 구천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흥분한 주민들은 방송사와 기자들을 마을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차단했으며 모 방송사와 일간지 기자는 카메라를 뺐기고 몰매직전까지 갔으나 ‘경남민주언론
하동은 첫 자락부터 끝자락까지 자연이 뭉텅이로 살아 숨 쉬는 연체동물이다. 수억 년 동안 지리산 계곡의 굵은 바윗돌을 사금처럼 잘게 부수어 섬진강 팔십 리 강바닥에 깔아놓은 하신(河神)의 작업은 오늘도 볼 수 있고 내일도 가면 볼 수 있다. 하동군(河東郡)을 삼신산(三神山)이 분만한 가장 아름다운 옥동자에 비교하면 과찬일까? 5월의 하동 땅에 성큼 첫 발만 내딛어도 현대병과 공해병에 찌든 심신이 금세 제 활력을 찾는다. 또한 산비탈에 군락을 이룬 야생차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는 40년 대 배고픈 시절 부엌 모퉁이를 기웃거리면 엄마가 밉지 않은 시선으로 노려보며 형들 몰래 쥐어주던 누룽지 냄새마냥 고소하다. 차와 불교는 연리지(連理枝)처럼 떼놓을 수 없는 관계로 얽혀 있다.
여성의 전화라는 여성시민운동 단체 외에는 시민운동의 사각지대라는 진해에 ‘진해를 사랑하는 시민들의 모임(진시모)’과 ‘희망진해 사람들’ 그리고 ‘진해사랑 시민모임’이란 시민단체가 비슷한 시기에 태동했다. 일방통행식의 관행적 관주도형의 시정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시민들의 참여정신과 저항의식이 만들어 낸 건강한 신생아들이다. 특히 ‘진해사랑 시민모임’ 이란 시민단체 daum cafe (다음카페)는 상식이 통하는 지역을 만들어야 할 시정과 지도자들이 상식을 도외시하는 데 의문을 품은 진해중앙시장의 평범한 상인인 이춘모님(63세·유아전문용품 베비라 대표)이 만든 시민운동단체다. 도탄이 심하면 민란이 일어나듯 너무 언로가 차단당하면 평범한 초로의 나이 드신 서민들도 이처럼 반란(?)을 일으킨
나는 여성이면서도 프로야구 마니아다. 특히 이승엽이 삼성라이온스에 중심타자로 있을 때부터 광적인 팬이었다. 백야의 야간 경기 때 그가 날리는 시원한 홈런 타구가 장외로 넘어가는 광경은 허공을 가르는 혜성처럼 장관이었다. 그 국민타자 이승엽이 요즈음 슬럼프에 빠졌다며 야단법석이다. 심지어 일부 누리꾼들과 성급한 야구평론가들은 이승엽은 슬럼프가 아니라 노쇠기에 접어든 조랑말이라며 혹평을 해댄다. 언제나 이승엽은 영웅이 됐다가 불펜선수가 됐다 하는 영욕의 기로에서도 당당했고 그래서 베이징 올림픽이나 월드야구에서 그가 보여준 프로정신은 불멸의 이승엽으로 국민들을 더 매료시켰다. 승패에 관계없이 이승엽은 프로정신에 철저한 야구의 달인이다. 그가 제 몫을 해내지 못할
며칠 후면 2553번 째 부처님 오신 날, 불타의 여섯 가지 이름 중 여래(如來)라는 호칭은 먼데서 오신 손님이란 뜻이다. 공자께서 설한 사서삼경 중 논어(論語)의 첫 장, 첫 구절에 ‘진정한 친구는 먼 곳에서 찾아온다’ 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아마도 성인이신 그분들이 말하는 친구란 친한 지기(知己)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동등한 인격권을 존중하는 뜻으로 해석한다. 너는 되고 너는 안 된다, 라는 논리가 아니라 너와 나를 하나로 보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사상이 불교의 본질이자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해 가장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원력이란 남의 도움으로 목적지를 가는 배와 같다. 부처님이나 보살은 반야용선(般若龍船)이란 원력(願力)의 상징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고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주장하는 민족도 드물다. 그러나 그 도덕과 윤리 뒷면에 웅크린 비도덕적 무자비함에는 소름이 끼친다.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벌어진 총기살인사건은 한국인 이민 1.5세대인 조승희 씨가 저지른 집단 학살극이다. 그렇다면 그는 미합중국 시민이지 대한민국사람은 분명 아니다. 미국은 다민족 사회로 지금의 대통령도 족보가 아프리카출신이다. 그런데도 당시 대한민국의 모든 미디어매체는 연일 조승희 씨의 총기사건을 천인공노할 범죄라며 규탄하고 모든 포털사이트에는 조 씨를 악마로 단정 짓는 리플들이 산을 이뤘다. 열 발자국도 못가서 교회나 성당 그리고 사찰이 즐비한 대한민국에서도 조승희 씨를 용서해야 한다는 성직자나
우리나라는 3대종교를 중심으로 발전한 나라이고 특히 불교는 기원이 25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종교이다. 삼국시대 본격 전래된 불교는 우리나라의 흥망성쇄와 함께 고락을 함께 하였지만 대개 국가의 안녕과 백성들 사이에서 기복의 수준을 넘지는 못했다. 불교문화 속에 스며있는 우리의 선도문화를 알게 되면 기복을 넘어 인간완성의 경지, 즉 신인합일을 알게 된다. 우리가 절에 가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대웅전이다. 이 대웅전은 부처님을 모셔둔 곳이고 절에서는 보통 법당이라고 부르며 여기에서 스님들은 불자들에게 부처님 말씀을 전한다. 스님은 스승님의 약자이다. 스승님을 빨리 발음해보면 그 어원을 알 수가 있다. 그러니까 스님은 원래 절에서만 쓰는 용어가 아니다, 절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벚꽃도시의 축제인 군항제 행사가 끝났다. 좁은 공간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처럼 한꺼번에 몰려 북적이는 인파들 속에 필자도 1km를 가는데 2시간 가까이 걸려 중원로터리 부근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군항제만 끝나면 침묵의 도시로 변해버리는 도시가 펄펄 살아 뛰는 자연산 활어처럼 생동감이 느껴져 짜증은커녕 형편만 허락되면 이런 행사와 축제가 진해에서 연중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해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진해시나 이충무공국선양회, 군악의장페스티벌을 비롯한 큰 무대와 작은 프린지 무대까지 나름대로 정성을 들인 흔적은 역력했다. 바가지요금, 좁은 주차 공간과 상습적인 교통체증, 시민정서를 고려하지 못한 자위대 초청 등으로 약간의 흠집은
지난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99년이 되는 날이다. 진해에서는 벚꽃이 만개를 위해 팔을 벌리고 있고 남도 바다의 파도는 생명을 키우기 여념이 없는 이때 우리는 봄바람이 채 닿기 전 만주 땅에서 의로운 죽음을 선택하신 그 분을 한번 쯤 떠올려야 한다. 참으로 뼈아픈 민족 수난기에 그 분은 쉽게 갈 수 없는 독립의 길을 선택하셨고 그로 인한 힘든 고통도 감수를 하셨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의 기개를 세계에 알리셨다. 동양평화를 해친 민족적 원흉이었던 일제의 이등방문을 제거하기 얼마 전, 우리의 독립군은 모처럼 일본군 포로를 사로잡았다. 이곳저곳에 군자금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하시던 안 의사께서 돌아오는 날, 적군포로 사형 집행되기 전 몇 분전, 안 의사는 동지들을 모아두고 일장연설
정조에 관한 일대기는 정사인 정조실록보다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가 저술한 ‘한중록’ 이라는 언문 일기를 참조로 해 적당하게 살을 붙인 것이 대부분이다. 인터넷이 발달된 세상에서 필자가 구차하게 정조에 대해서 장황하게 늘어놔 봐야 의미 없는 얘기고 단 하나 정조의 치세기간 중에 괄목할 만한 업적이 있다면 인간적으로 그는 하늘을 울린 효자였으며 지도자로서는 당시 언감생심 그 누구도 입에 담기조차 꺼려했던 서얼(천민에 가까운 첩의 자식들)들을 등용하는 ‘서얼허통절목’을 통과시켜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 네 명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채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한 일이며, 서학이라는 금지된 종교인 천주교에 대해 누구보다 관대했던 폭넓은 사고를 지닌 지도자였다. 정조는 관례화된 귀족이나
너무 조용하고 깨끗해 동양의 나폴리라며 세인의 사랑을 받던 진해시가 순식간에 침묵의 도시에서 민란의 도시로 변해버렸다.문제의 핵심은 호국선양위원회에서 개최하는 이충무공전승을 추모하는 군항제행사 기간 내에 왜 일본자위대가 낀 군악의장이 시연되느냐는 게 여론태풍의 형성된 원인 역할을 했다.필자는 진해시가 주최하고 사단법인체인 군악의장페스티벌이 운영하는 군악의장페스티벌을 반대하지 않는다.반대가 아니라 볼거리 없는 군항제에서 진해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그나마 눈요기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으로 환영했다.그런데도 이 축제가 친일청산이나 일본타도로 극렬하게 여론이 변질화 된 것은 진해시와 군악의장페스티벌이 운영의 묘를 살리지 못한 게 화를 자초한 것이다.또한 진해시는 그동안 홈피에서 일반시민이 호소하고 시민단체나 논객들이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