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이루장구하(離婁章句下)에는 ‘대인이란 그의 어린 아이 때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라는 대목이 있다. 적(赤)에는 ‘붉은 색’이라는 뜻 이외에도 ‘아무 것도 없는 상태, 옷을 걸치지 않고 몸을 드러냄’이라는 의미가 있다. 적빈(赤貧)란 ‘극빈(極貧)’을, 적수(赤手)란 ‘맨손’을, 적지(赤地)는 ‘불모지’를 뜻한다. 순자(荀子)는 참되고 정성스런 일편단심(一片丹心)을 적심(赤心) 이라고도 했다. 적자(赤子)란 ‘갓 태어난 아이의 몸 색깔이 붉은 색’이라는 점에서 ‘갓난 아이’를 가리키는데, 서경(書經)에서는 적자(赤子)를 백성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다. 맹자는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의 마음’을 가진 이를 대인(大人)이라 생각했던 것이니,
상서(尙書) 태서(泰誓)편은 주(周)나라 서백후의 아들인 발(發)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함에 임하여 군사들을 모아 놓고 훈시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 소인은 새벽부터 밤까지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돌아가신 아버지 문왕의 명을 받았으니 하느님에게 제사를 지내고, 큰 땅에도 제사를 지냈으며, 그대 무리들을 거느리고 하늘의 벌하심을 이루려는 것이오. 하늘은 백성들을 가엾게 여기시니, 백성들이 바라는 바를 하늘은 반드시 그대로 따르시오. 그대들은 바라건대 나 한 사람을 도와 영원히 온 세상을 맑게 하시오(爾尙弼予一人, 永淸四海). 때가 되었으니 잃어서는 아니 되오(時哉弗可失)!” 기원전 222년, 서백후 문왕(文王)의 아들인 발(發)은 정식으로 제위에 올라 중국 땅을 다스리게 되었으니,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율기육조(律己六條)’라 해 벼슬아치가 지니거나 버려야 할 여섯 가지 몸가짐을 제시한다. 다산은 책에서 목민관은 올바른 몸(飭躬·칙궁)과 청렴한 마음(淸心·청심)을 가져야 하고, 집무할 때 사사로운 손님을 가려야 한다(屛客·병객)는 등의 가르침을 적었다. 집무실에 출입하는 이를 잘 선별해야 하고, 밤중에 받은 뇌물은 아침이면 금방 탄로나게 마련이어서 아니함만 못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사치스러운 치장은 백성이 싫어하고 귀신도 시기하니, 자신의 복을터는 격이라고 일렀다. 특히 선비문화에서는 스스로의 언행을 자신은 물론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근본으로 삼아 왔다. 지난 6·4지방선거때 현 사천시의원 당선자들은 선거구 주민들에게 심부름 꾼이 되겠다며 후보 때 거리곳곳을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 손권전(孫權傳)의 이야기다. 동한(東漢) 말년, 조정의 통제력이 상실되자, 강동(江東)의 손책(孫策)은 자신의 세력 기반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에 강동 오군(吳郡)의 태수인 허공(許貢)은 황제에게 밀서(密書)를 보내 손책을 제거할 것을 건의하고자 하였으나 손책에게 발각되어 죽고 말았다. 한편 사냥을 나갔던 손책은 허공에게 큰 은혜를 입은 식객들이 쏜 화살을 맞아 죽었다. 당시 손책의 아들 손권(孫權)은 겨우 15세. 부친의 죽음을 비통해 하며 군정을 살피지 않자, 장소(張昭)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였다. “지금 간사한 무리들이 우리들을 뒤쫓아 오고, 이리 같은 놈들이 도처에 숨어 있는데, 자네는 부친의 죽음만을 슬퍼하고 대사(大事)를 돌보지 않고 있으니, 이는 문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5년 조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춘추시기, 진(晉)나라 대신(大臣) 양처보(陽處父)는 위(衛)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노(魯)나라 영성( 城)의 한 집에 묵게 되었다. 집주인 영은 양처보의 당당한 모습과 비범한 행동을 보고 그와 함께 갈 것을 결심하였다. 양처보의 동의를 얻은 후, 영은 아내에게 이별을 고하고 그를 따라 길을 나섰다. 그런데 영은 온(溫) 땅에 이르자 생각을 바꾸어 집으로 돌아왔다. 영의 아내는 매우 이상하게 여겨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물었다. 이에 영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 사람은 다만 사납고 강한 성질로만 처세하고, 겉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속으로는 덕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의 원망을 집중시키고 있소(且華而不
온 국민이 세월호 사고로 슬픔과 비통함 속에 탄식의 시간은 한 달이 훌쩍 넘어가고 말았다. 아직도 16명의 실종자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고, 여전히 수난구조대원들은 오늘도 목숨을 건 힘겨운 수색활동을 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이번 참사 이후 육상재난은 소방본부와 지방자치단체, 해양재난은 신설되는 해양안전본부가, 기타 특수재난은 특수재난본부가 책임지는 것으로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해양재난은 해경의 구난구조, 경비조직을 해양안전본부로 새롭게 개편하면서 현장과 컨트롤타워의 지휘권 확립을 구상해지만, 육상재난을 맡은 소방본부와 특수재난을 맡게 되는 특수재난본부는 지휘권 확립이 제대로 될 것인가에 우려를 갖게 한다. 재난현장은 전쟁터와 같다. 현재의 소방인력은 3만8500여
상서(尙書) 경명편에는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백경을 태복(太僕)으로 임명하며 훈계하였던 말이 기록되어 있다. “그대의 아래 사람들을 신중히 고르되, 교묘한 말을 하는 자, 좋은 듯 꾸민 얼굴을 하는 자, 남의 눈치만 보는 자, 아첨하는 자는 쓰지 말고, 오직 올바른 사람만을 쓰도록 하시오(無以巧言令色便 側媚, 其惟吉士).”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에는‘교묘한 말과 꾸민 얼굴에는 인(仁)이 적다’라는 교언영색선의인(巧言令色鮮矣仁)이라는 말이 있으며, 공야장(公冶長)편, 양화(陽貨)편 등에도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교언(巧言.fine words)은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교묘하게 꾸민 말’을 뜻하며 영색(令色.an insinuating appearance)이란
맹자(孟子) 진심장하(盡心章下)편에는 스승 맹자(孟子)와 제자인 만장(萬章)의 문답이 기록돼 있다. “만장이 온 고을이 다 그를 향원(鄕原)이라고 한다면 어디를 가나 향원일 터인데 공자께서 덕(德)을 해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맹자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겉으로는 비슷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을 미워한다(惡似而非者). 강아지풀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곡식의 싹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망령됨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정의를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말 많은 것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믿음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보라색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붉은 색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향원(세속에 따라 야
공자(孔子)의 음주 습관을 논어 향당편(鄕黨篇)에서는 ‘주량이 무량이되 난잡하지 않았다’고 서술돼 있다. 조선 22대 국왕인 정조에게 한 신하가 “전하, 공자님께서 주량이 무량이되 난잡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의미는 무엇이옵니까?”라고 여쭈었다. 정조는 “주량이 무량이라고 하신 것은 술을 마시지 않아야 할 때 술을 마시지 않는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술을 마셔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 기쁘게 한껏 먹는 것이다”고 했다. 즉, 중요한 일이 있어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아야 할 상황이면 주변 유혹을 극복하고, 술을 마시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고, 중요한 일이 마무리되어 기쁜 자리가 되어 축하를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함께 즐거워하며, 기쁘게 마시되 난잡하게 먹어서는 안된다는
‘넓게 퍼진 안개 속에 있다’는 뜻으로, 일의 갈피를 잡을 수 없거나 사람의 행적을 전혀 알 수가 없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일반적인 힘이 아닌 신비한 방술로 믿기 힘든 이적을 일으키는 도술(道術)에 관한 관심과 이야기는 예로부터 많다. 후한 때 장해(張楷)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있다. 장해는 성품이 도술을 좋아해서(性好道術) 5리에 안개를 만들 수 있었다(能作五里霧). 임금이 여러 번 능력을 인정해서 등용하려했지만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제자들만 데리고 학문을 강학할 뿐이었다. 인심은 그럴수록 더욱 찾게 되는지 여러 직종의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세상을 피해 화음산(華陰山) 기슭으로 낙향하였다. 그를 찾은 인물 중에 관서(關西) 출신의 배우(裴優)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도 3리에 안개를
갑오년 새해가 밝았다. 지난해 산청군은 참으로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해를 보냈다. 세계전통의약엑스포의 성공적인 개최로 산청의 브랜드는 글로벌화 되었지만, 그러나 연내 확정 짓겠다던 지리산 케이블카는 답보 상태로 한해를 넘겼고, 산청군 관내 거점학교 통합 문제는 지역 간의 갈등과 이해관계만 남긴 체 무산 되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일들로 어떤 이들에게는 보람이요 또 어떤 이들에게는 탄식과 안타까움으로 한해를 보냈을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새롭다’는 것을 여러 의미로 여기고 사용한다. ‘바꿈’으로도 쓰이고 ‘발전’으로도 쓰이며 ‘과거로의 청산’으로도 쓰이기도 한다. 참으로 우리말은 같은 단어이지만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과거의 영광은 내가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아가는
경남도와 도 내 시·군 및 공기관에서 언론사에 지원하는 연정광고비는 수 십억을 상회한다. 그런데 지역 언론 육성을 위한다는 명분은 상투적인 위장술이고 거개가 특정 언론에 지원이 집중되고 있다. 정치권이나 자치단체 수령방백의 선호도나 아부와 충성도에 따라 당근을 던져주는 식의 언론 육성책은 사회의 공기인 언론을 식물언론으로 만들어 선거용이나 지자체장의 시녀로 전락시키는 바람직하지 않은 막장 고육지책과 다를 게 없다. 언론이 곪은 국가와 시회가 지닌 환부를 도려내는 과감한 시술 그 자체를 포기하지 않을 때라야 언론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언론은 어떤 권력이나 금력에도 굴하지 않고 최상위 층과 최하위 층을 연결하는 파이프라인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신문이 정상적인 허파역할을 하지 못하고 독립적
한해가 저물어 간다. 산청군은 2103년에는 세계전통의약엑스포를 통해 세계 속으로 한걸음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총 관람객 210만명이라는 사상 유례없는 성공과 국제행사 유일 ‘흑자 엑스포’라는 찬사를 받으며 성공적으로 치뤘다. 엑스포를 통해 산청군의 역사는 새로 쓰여졌으며, 전통의약의 기치는 국민들 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그런 산청이 기자는 자랑스럽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자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들이 구분 지어진다. 차별을 두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스타일대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수 십명을 만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라 만나는 사람마다 대하는 방법이 달라진다. 인사만 나누는 사람, 차만 대접하는 사람 그리고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지난 19일 산청전통의약엑스포가 열리는 동의보감촌에서는 폐막일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엑스포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국민가수 이미자씨의 콘서트가 열렸다. 이씨는 73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 동안 사회자도 없이 21곡의 노래를 물 한 모금 마시지도 않고 불렀다. 그 나이에 변하지 않는 목소리도 노래를 부른 것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미자’라는 단일 상품을 통해 1만여명이 넘는 공연 관람객이 모였다는 것이다. 엑스포 기간 내내 유명가수 여러 명이 모여서 꾸민 크고 작은 무대에서도 이처럼 많은 인파가 모이지 않았었다. 그 것이 이미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고, 이미자이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행사장을 찾은 것이다. 이미자씨는 1959년 데뷔이래 꾸준하게 국민들
회남자 설산훈(說山訓)에는‘하나의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해가 장차 저물려는 것을 알고(見一落葉而知歲之將暮), 병 속의 얼음을 보고 천하에 추위가 닥쳐옴을 아는 것은 가까운 것으로써 먼 것을 논한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당나라 한 시인의 시(詩)에는‘떨어지는 잎사귀 하나로 천하가 가을임을 알다(一落葉知天下秋)’라고도 했다. 일엽지추(一葉知秋)는‘하나의 낙엽을 보고 곧 가을이 왔음을 알다’라는 뜻이다. 이는 사소한 것으로써 큰 것을 알며, 부분적인 현상으로써 사물의 본질이나 전체와 발전 추세 등을 미뤄 알게 된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우리는 정치와 경제에서 그리고 교육에서도 낙엽들을 보았으며, 지금도 사회 각 분야에서 새로이 떨어지는 많은 잎사귀들을 보고 있다. 하지만 서양 속담에
결자해지(結者解之)란 ‘매듭을 묶은 사람이 그것을 풀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일을 저지른 사람이 그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일 때 결자해지라는 사자성어를 사용한다. 결자해지(結者解之)는 홍만조(1643~1725)의‘순오지(旬五志)’에서 유래된 말로 홍만종은 벼슬이 높았다거나 학자로서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저술가로, 그리고 문인으로 명망이 높았다. 그는 순오지에서 ‘결자해지 기시자 당임기종(結者解之 其始者 當任其終)라 하여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자기가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요즘 우리의 주변에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모습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 너무 많다. 친구간의 사소한 약속에서부터 정치가들의 중요한 약속들까지 너무 쉽게 말
도둑 셋이 무덤을 도굴해 황금을 훔쳤다. 축배를 들기로 해서 한 놈이 술을 사러 갔다. 그가 오다가 술에 독을 탔다. 혼자 다 차지할 속셈이었다. 그가 도착하자 두 놈이 다짜고짜 벌떡 일어나 그를 죽였다. 그새 둘이 나눠 갖기로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둘은 기뻐서 독이든 술을 나눠 마시고 공평하게 죽었다. 황금은 길 가던 사람의 차지가 되었다. 연암 박지원의 황금대기(黃金臺記)에 나오는 얘기다. 연암은 다시 주역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면 그 예리함이 쇠도 끊는다.(二人同心 其利斷金)”원래 의미는‘쇠라도 끊을 수 있으리만치 굳게 맺은 한 마음의 우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연암은 말을 슬쩍 비틀어“두 사람이 한마음이 되면 그 이로움이 황금을 나눠 갖는다”라는 의미
응접불가(應接不暇)란‘차례차례로 나타나는 산수(山水)의 풍광(風光)이 하도 수려(秀麗)해서 일일이 모두 구경할 겨를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편(言語篇)'에 나온다. 진(晉)나라 사람으로 왕헌지(王獻之)란 인물이 있다. 이는 유명한 서예가인 왕희지(王羲之)의 아들로서 아버지에 버금가는 서예가요, 고관이었으며 아버지 왕희지와 함께‘이왕(二王)’으로 일컬어지던 사람이다. 왕헌지는 한때, 산음지방(山陰地方, 회계산(會稽山)의 북쪽지방)을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 경치의 수려함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응접불가’, 즉‘접함에 응할 겨를이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었다.“산음(山陰)의 길은 실로 장관(壯觀)이다. 길을 걸으면 높이 솟은 산과 깊은 개울이 연달아 나타난다. 그것들이 서로
사기(史記) 상군열전(商君列傳)은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정치가인 상앙의 법령 시행에 관한 일화가 실려 있다. 상앙은 새로운 법을 정하였으나, 백성들이 이를 믿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는 세 길이나 되는 나무를 남문(南門)에 세우고 이를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 금 열냥을 주겠다고 포고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감히 옮기지 않았다. 상앙이 다시 금 오십냥을 내걸자, 한 사나이가 나타나 그것을 북문으로 옮겼다. 상앙은 즉시 그에게 상금을 주어 거짓이 아님을 내보였다. 이렇게 하여 신법을 공포하였는데, 일년 후 백성들이 그 법령의 불편한 점을 고하며 도성으로 몰려왔다. 이때 태자(太子)가 그 법을 어겼다. 상앙은 법이 잘 지켜지지 않은 것이 상류층 사람들이 범법하기 때문이라
군주나 정치인들이 정사를 잘 돌보거나, 의료인들이 인술(仁術)을 펼칠 때 흔히 쓰는 말로 논어(論語) 옹야(雍也)편을 보면, 자공(子貢)이 말하였다. “만일 백성들에게 널리 은혜를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如何). 어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에 공자는 “어찌 어질 뿐이겠느냐? 반드시 성인(聖人)일 것이다. 요순(堯舜)같은 성인 임금도 그 부분에서는 제대로 다하지 못할 약점으로 여겼느니라”(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 其猶病諸)라고 했다. 모든 백성들에게 온갖 시혜를 베풀고 그들이 당하는 온갖 재난이나 환란을 구제해주는 것, 그것이 요순정치의 이상이었고 공자의 위대한 꿈이었지만, 그 일은 참으로 지난한 일이어서 인(仁)의 수준도 넘는 성(聖)스러움에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