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나라는 연성(軟性) 파시즘 사회로 가고 있다. 독일 히틀러식 강성 나치즘은 아니라도 이와 비슷한 연성 나치즘 정치체제로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부동산 정책이라든가, 다수당의 독재적 횡포라든가, 사유재산의 일부를 감시케 하는 등 자유민주사회 속에서의 시장경제 논리와는 완전히 다른 정책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일부 국민들은 나라를 등지면서 외국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지난해(2019년) 한국을 떠나 해외로 이적한 국민의 숫자는 금융위기 이후 11년 만에 최대로 많은 이민자가 기록됐다. 외교부에 따르면 지난해에
2700만원짜리 이탈리아 식탁, 439만원짜리 스위스 의자, 200만원짜리 덴마크 조명 등은 서울 모 백화점 서울 대치동 강남점에 전시돼 있는 고급 디자인 가구 가격이다. 명품과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위해 영국과 일본에 이어 우리나라는 세계 열 두번째로 문을 연 가구 매장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시장원리는 수요자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필연적이기 때문에 이 매장을 질시하는 것이 아니라 차도 없고 두끼로 연명하고 하루에 2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밤낮 없이 뛰고 있는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덩이를 안고 오늘을
방송을 흔히 제2의 신(神)이라고 한다. 그만큼 방송의 영향이 전지전능해서 마치 절대자인 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언론학자들은 생각하고 있다. 모든 방송의 중심적 가치는 정치적 중립성과 사회적 가치기준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데 있다. 그러나 최근들어 일부정치 집단의 ‘마초’들에 의해 방송의 목적과 가치가 크게 훼손되고 있다. 민주화 이후 극심한 정파주의의 덫에 빠진 방송들은 모든 현안을 이념의 렌즈로 굴절시켜 사회갈등을 날카롭게 증폭시키고 있다. 지금 운행되고 있는 지상파 방송과 케이블 방송 그리고 종합편성채널까지 합치면 450여
돈키호테의 묘비명에는 ‘미쳐서 살고, 정신들어 죽는다’고 쓰여져 있다. 수 많은 욕망과 이중의 가면을 쓰고 행동하던 사람들이 줄줄이 떨어졌다. 이성은 죽어가고 인간이 최소한의 지켜야할 규범과 도덕이 타락한 현장에 유명한 정치지도자와 교사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사회가 얼마나 가증스런 이중성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차 있는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맑은 정치 행각을 했다던 서울시장과 부하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했다던 부산시장, 그리고 충남도민을 받들었다던 지사 등은 우리사회에서 최상의 정치지도자로서 특정 정당을 대표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그 저
지난 9일 오후, 온 나라가 들썩였다. 박원순 서울시장 실종, 박 시장 자녀가 경찰과 119에 실종 신고를 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숨가쁘게 돌아갔다. 많은 사람들은 “무슨 일이지?”, “설마?”…. 그러나 옛말에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뇌리를 벗어나지 못할 즈음, ‘설마’는 결국 안타까운 현실로 다가섰다. 박 시장과 나는 고향 친구다. 박 시장이 후배이긴 하지만 친구 같은 마음으로 60~70여 년을 고향 창녕의 미래, 시민운동가로 인권변호사 시절의 어려움,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앞으로 어려움이 많을 것
경남도의회 개원 이후 최초 여성, 최연소 의장을 지내고 지난달 30일 임기를 마친 김지수 도의회의장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김 의장은 충분한 ‘유정의 미’를 거둔 사람”이라며 떠나 보내기 싫은 표정들이 역력했다. 일반적으로 좋은 정치가 자질은 이전의 왕이나 양반 관료의 자질과 동질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현대인들 사이에 청렴(淸廉)·근검(勤儉)·도덕(道德)·경효(敬孝)·등 덕목을 겸비한 관직자에게 주어졌던 호칭인 청백리(淸白吏)는 무한히 청렴한 기준을 제시하고 정치가들이 거기에 맞춰주길 바라고 있다. 또 현
생명의 자기결정권을 상실하는 순간 그 생명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Srtre, 19051980)는 화려한 생명의 존엄은 실존(實存)으로 승화되면서 그 가치가 인정된다고 했다. 특히 실존적 존재는 무관심을 극복하는 총체적 주체성이다. 때문에 무관심은 비극을 낳는다. 언제나 관심을 두지 않고 있던 문제가 어느 순간 갑자기 발생했을 때 그 당혹감을 매우 클 수 밖에 없다. 우리 몸 전체는 모두가 귀중하고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근원적 생명력의 소유인 동시에 주체적 가치인 것이다
인간의 본성에 얼마나 잔인하고 악질적 폭력성이 있는 것인가. 이번 창녕군 관내에서 일어난 9세 소녀 린치사건은 2년 동안이나 계속됐는데도 이웃에서는 알지도 못한 뒤 급기야는 목줄의 쇠사슬을 풀고 집을 탈출한 사건은 인간의 폭력성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보여준 사건이다. A양은 부모(의붓아버지, 친모)는 벌겋게 달궈진 프라이팬에 아이의 손가락을 지지고 쇠 젖가락으로 발바닥을 찔렀다. 이 바람에 손바닥 지문이 모두 없어졌다. 심지어는 목에다 쇠사슬을 감아 4층 꼭대기 테라스에 묶어두기를 예사로 했던 것이다. 목에 자물쇠가 채워진 채 이틀을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대출을 빙자한 보이스피싱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는 전형적인 ‘대출빙자형’ 보이스피싱 수법으로, 한때 개인정보가 유출됐다며 검찰청 등의 수사기관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수법이 유행해 많은 서민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최근에는 이처럼 대출을 빙자한 사기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유명 금융기관을 사칭해 신용이 낮아도 즉시 대출이 가능하다면서 신용등급 등의 이유로 대출이 어려운 서민들을 유혹한다. 시중 금융기관 보다 낮은 금리로 대출을 해주겠다고 속이는 등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운 뒤 보
사회가 한쪽으로 흘러 발전의 역동성을 잃을 때 그 사회는 부패하기 시작한다. 사회 내부가 부패한다는 것은 그 조직의 일부가 붕괴된다는 징조다. 여기에는 정부의 조직뿐만 아니라 사회내부의 기초적인 시민단체마저 독선에 빠진 채 관료적 타성에 빠진다면 그 사회는 생명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모든 정책 추진에 있어 현실적 긴장감을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판(批判)’이 활성화돼야 한다. 무엇보다 비판이란 어떤 사실이나 정책 추진과정을 살펴보고 그 실행이 적법한 것인지 아니면 형식적 오류(誤謬)에 접어든 것인지를 살펴 보는 가
지난달 28일 오전 9시 30분부터 서울에 있는 채널A 방송국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이 무려 41시간 동안 계속됐다. 원인은 서울 MBC기자가 보도한 내용은 채널A 방송기자와 검찰 고위간부간에 오간 대화 녹취록을 찾기 위한 압수수색인데 아직 수사기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당장 결론을 낼 수는 없다. 이번 사건은 첨예한 이념 갈등과 권력형 비리를 찾는다는 데 사건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무엇보다 기자는 ‘기자’는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는 증인이다. 그 역사의 기록은 반드시 진실돼야 한다. 그 진실이 가공되거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사실이라
코로나19 사태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행하고 있다. 사람과의 거리를 2m 이상 두고 생활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 인류학 교수인 에드워드 홀(E. Hall)교수는 인간관계에 있어 친밀한 공간을 4단계로 나눴는데 그 첫 번째가 친밀공간으로서 46cm의 거리를 두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과 48~120cm 사이의 공간을 개인적 공간, 150~180cm를 사회적공간, 360cm 이상 떨어졌을 때를 공적인 공간으로 나눴는데 이 때 공간은 ‘거리’를 두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360cm정도 떨어진다는 것은
지난해 9월, 충남 아산의 한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숨진 김민식군의 이름을 딴 ‘민식이법’이 발의됐고 지난 3월 25일부터 전면적으로 시행됐다. 개정된 ‘민식이법’은 어린이 보호구역 내 과속 단속 카메라와 과속 방지턱, 신호등 등의 설치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어린이 보호구역 내에서 속도를 시속 30km 초과해 사고가 일어나거나 안전에 유의하지 않아 어린이에게 상해를 가한 경우 운전자는 1년 이상 1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상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 받게 되며 어린이가 사망에 이르게 된 경우 무기징역
이번 21대 국회 총선에서 참패했다고 보수 진영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를 통해 자유와 번영을 이룩하겠다는 보수당의 의지가 패권적 운동권 진보정당에 무참히 깨졌기 때문이다. 보수적 가치를 최고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지독한 개인주의적이고 타협이 없는 수구꼴통들의 집합체임이 분명해졌다. 이번 선거기간 내내 보수통합당이 만들어 내고자 했던 세상이 무엇인지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보수적 가치는 ‘입헌군주주의와 법치주의’에서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태극기 부대나 앞세우고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만 목을 맨
긍정과 부정이 날카롭게 부딪칠 때 소박한 합리성을 갖춰야함에도 필요 없는 감정의 포퓰리즘에 젖어 변화를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변화라는 새로운 자유의 길을 스스로 가지 못하고 두려운 나머지 언제나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마는 것이다. 누구는 잘도 변해가고 또 다른 현실에 적응 속도가 빠른데, 왜 나만이 보편적 합리성을 찾지 못하고 태생적으로 주저앉고 마는 가를 생각하면 늘 불안해지고 남과의 경쟁에서 포기하고 마는 것을 스스로 이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 용기가 바로 변화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매 시간마
변한다는 것은 속일 수 없는 진리다. 온 삼라만상이 가만히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람도 변하고, 나무도 변하고, 파도도 변하고 그리고 시간도 변한다. 무엇하나 변(變)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해야 산다고 야단이다. 얼마나 변해야 살 수 있다는 것이며 어떻게 변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인가. 미국의 경제학자인 조지 싱(G. Sing) 교수는 그의 책 ‘동기의 기적(The Miracle of Motivation)’에서 자기 생활의 영역 속에서 성공할 수 있는 ‘동기의 기적’을 찾아내야만 변화에 적응할 수 있다고 했
국회의원은 지역의 대표인 동시에 국민을 대표하게 된다. 그래서 막스 베버(Max Weber)는 정치인은 반드시 “균형감각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지금 정부에서 집행하고자 하는 18조원이란 돈은 긴급 재난 지원금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긴급을 요하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해도 국회의원 총선거를 코앞에 두고 현금을 살포하는 것은 관료들의 자기합리화와 자유당 말기 금권타락 선거행위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죽어가는 자영업자를 구하고 굶어 쓰러진 빈곤층을 도와준다는 구실로 거액의 현금을 써 댄다면 이번 국회의
코로나19 바이러스 창궐을 핑계로 전체 국민의 절반 이상, 70%까지 ‘긴급재난 지원금’을 지급한다고 한다. 전국민 50%인 2589만 명에게 1인당 50만원씩을 지급할 경우 13조원 가까이 든다. 만약 국민의 70%로 한다면 18조원이란 천문학적인 예산이 든다. 지난달 27일 기획재정부에서는 1000만 가구에 가구당 100만원어치 상품권과 체크카드를 지급하는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물론 코로나19 국난 극복을 위한 ‘긴급 재난 지원금 지원’을 정부가 강력히 추진할 계획을 밝히자 경기도는 이미 가구당 10만원 지급은 물론이고 경기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전 세계는 방역 비상에 다른 국민 총동원령을 내리고 있다. 이태리 경우는 길거리에 나다니는 시민을 체포하거나 강제로 돌려보내고 있는가 하면 프랑스는 3명 이상 모이지 말고 전 학교는 휴교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인 미국과 캐나다가 30일간 국경을 폐쇄시키는 등 국가마다 군인까지 동원해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전면 전쟁을 치르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3월 6일 기준 37개국으로부터 입국금지 조치를 당하고 있지만 국경을 봉쇄하지 않아 매일 6000여 명 외국인이 입국하고
부부는 협의이혼과 재판상 이혼을 통해 남남이 될 수 있다. 이혼에 대한 두 사람의 의사가 합치하면 협의이혼을, 그렇지 않다면 소송을 통해 재판상 이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상 이혼을 청구하기 위해서는 법이 정한 이혼사유에 해당해야 한다. 민법 제840조는 배우자의 부정행위, 악의의 유기, 부당한 대우 등을 이혼사유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배우자의 ‘부정행위’로 인한 이혼이다. 배우자의 부정행위가 있는 경우 이혼소송이 가능할 뿐더러 배우자 또는 상간자를 상대로 정신적 고통 등을 이유